골디락스의 지혜

한상희 2026. 6. 2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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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의 마중물 교육] ② 제주 수눌음과 맞닿은 공존의 비결
제주의소리가 새로운 칼럼 [한상희의 마중물 교육]을 선보입니다. 마중물 교육은 아이를 바꾸려는 기술 이전에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고자 합니다. 침묵을 견뎌내는 교육자의 '시간'을 나누고, 이미 작동하고 있는 '강점'을 환대하는 실천의 철학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이 정기적인 성찰의 여정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묵묵히 분투하는 교사와 부모들에게 다정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글]
AI 생성 이미지.

곰 세 마리 오두막의 비밀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어릴 적 누구나 손뼉을 치며 신나게 불렀던 노래이다. 그런데 이 익숙한 동요의 뿌리는 뜻밖에도 영국의 오래된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이다. 우리가 무심코 흥얼거렸던 이 곰 세 마리의 집이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비밀을 품고 있다.

동화 속 금발 소녀 골디락스는 숲속을 헤매다 주인이 없는 곰들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세 그릇의 죽이 차려져 있었다. 소녀는 차례대로 죽을 맛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죽은 너무 뜨거웠고, 두 번째 죽은 너무 차가웠다. 세 번째 죽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배고픈 소녀가 마침내 선택한 것은 적당히 따뜻한 세 번째 죽이었다. 

'골디락스(Goldilocks)'는 본래 동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오늘날에는 이처럼 극단을 피한 가장 이상적인 균형 상태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 경제학에서 경기가 너무 과열되거나 너무 침체되지도 않은 딱 알맞은 황금기를 일컬어 '골디락스 경제'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적당한 균형의 지혜를 가만히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의 교육과 사회를 본다. 과연 우리는 그 적당한 온도의 죽처럼 삶의 가장 아름다운 균형과 상식을 잘 지켜내고 있을까.

제주 삼춘들의 수눌음

제주의 옛 부모님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 오래된 유산인 '수눌음'을 앞서 말한 골디락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바쁜 철마다 이웃집 삼춘네 밭으로 가 종일 땀을 흘리며 농사일을 도왔다. 며칠 뒤면 그 삼춘 또한 어김없이 우리집 밭을 찾아와 당신의 일처럼 온 정성을 다해 일손을 보탰다. 그것은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형편을 헤아리며 오고 가던 정겨운 품앗이었다.

이 품앗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균형의 법칙이 숨어 있다. 내 일처럼 돕되 상대의 농사를 통째로 대신 지어주는 지나침(뜨거운 죽)도 없었고, 남의 집 농번기를 모른 척하는 인색함(차가운 죽)도 없었다. 제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들마다 서로의 밭을 오가며 적당한 손길을 교환했다. 나는 여기에서 서로의 자립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던 영리한 균형을 본다.

생각해보면 이 수눌음이야말로 마을공동체가 오래 공존할 수 있도록 돕는 '마중물'이었던 셈이다. 메마른 펌프에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붓는 딱 한 바가지의 물처럼, 수눌음은 이웃이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만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죽처럼 말이다

마중물 한 바가지

이 수눌음의 이치는 교육적 관점에서도 '마중물 교육'과 그 결이 같다. 펌프가 터질 때까지 양동이 채로 물을 퍼붓는 '과잉 친절'은 펌프를 망가뜨린다. 반대로 물을 전혀 주지 않는 '인색함'은 펌프를 메마르게 한다. 옛 제주의 어른들이 수눌음이라는 딱 한 바가지의 마중물로 서로의 자생력을 자극했듯, 교육 역시 그 알맞은 온도를 품어야 한다

자녀를 향한 깊은 사랑이 때로는 아이가 마주해야 할 삶의 과정을 대신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해내야 할 영역까지 주변의 과도한 손길이 모두 지원하고 대신해 주는 교육은, 오히려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고 스스로 생각하며 성장할 기회를 가로막기 쉽다.

진정한 교육은 수눌음처럼, 마중물처럼,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펌프질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의존을 만들지 않는 적당한 온도의 환경을 제공하고, 아이의 주체성을 존중하며 묵묵히 기다려주는 일이다.

골디락스의 지혜로 나누는 수눌음

오늘날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 알맞은 균형을 지켜내기가 참 쉽지 않다. 본래 삶을 배우고 나누는 자리란 아이와 부모, 교사, 그리고 이웃이 다 함께 채워가는 커다란 마당이어야 한다. 이 마당에서 서로가 딱 필요한 만큼 건강한 보탬이 되어줄 때, 우리의 삶과 사유도 비로소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상식은 바로 이 따뜻한 연결을 회복하는 것이다. 옛 제주의 부모님들이 이웃의 일손을 보고 기꺼이 팔을 걷어붙였듯, 이제 우리에게도 서로의 성장을 다 함께 거드는 다정한 시선이 머물기를 바란다.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뜨겁게 간섭해 스스로 설 기회를 차단하지 않는 것. 반대로 너무 차갑게 무관심으로 방치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서로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마중물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가장 상식적이고 최적화된 공동체의 모습이다

골디락스가 선택했던 그 '따뜻한 죽' 한 그릇을 수눌음처럼 사이좋게 나누는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한상희
한상희

제주 서귀포 출생으로 제주대에서 '지역 기반 세계시민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등 교사, 장학사, 중학교 교감 등을 거쳐 현재 서귀포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5년 167개국이 참여한 <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에서 '제주에서 세계시민을 만나다'라는 강연으로 4.3을 세계에 알린 바 있다.

단독 저서로 《4·3이 나에게 건넨 말》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제주역사》, 《새로운 교육과정에 담은 세계시민교육》, 《문화 다양성의 이해》, 《온 세상이 사회교과서》를 공동 집필했다. 현재 한국회복적정의협회 제주지부장을 맡아 전국 중등학교 및 교육 현장 교류를 통해 회복적 학교문화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