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의원 한구석을 내준 우석균 선생을 기억하며

20여 년 전 어느 날, 동갑내기인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와 서울 성동구 성수동 골목길에 우리가 설치한 노동자 건강상담 천막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얼마 전 들어선 고급 아파트 입주민들을 걱정했다. 성수동에는 일명 ‘마찌꼬바’라고 부르는 작은 금속가공·염색·인쇄·제화 공장들이 구석구석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짐을 싣고 내리는 오토바이와 화물차로 골목이 분주했고 작업장에서 배출되는 본드, 염료 냄새, 쇳가루 같은 오염물질도 만만치 않았다. “이 사람들, 이런 거 잘 알아보고 저 비싼 아파트에 입주한 걸까? 사기당한 거 아냐? 다들 떠날 거 같은데?”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부동산 예측이었다. 정작 밀려난 것은 공장과 노동자들이었다. 지난해 성수의원도 문을 닫았고, 이제 우석균 선생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떤 작은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느낌이다.
〈시사IN〉에서 추모 글을 요청받고 망설였다. 비교적 오랜 시간 선생님과 알고 지냈고 각종 강연, 회의, 노동조합 자문 자리를 함께했지만, 막상 선생과 개인적 친분이 깊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식 모임이 끝나면 이어지는 뒤풀이에서 속 깊은 이야기와 고민을 주고받으며 친해지기 마련인데 나는 그런 자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아 선생과 개인적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다. 회식이나 뒤풀이를 싫어하는 게 MZ세대의 특성인 줄 알지만, 사실은 X세대가 그 원조다. 그래서 이 글은 선생님을 기리는 여러 추모 글 가운데 으뜸으로 건조한 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우리 노동건강연대는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노조로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과 함께 ‘지역’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성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 둥지를 틀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성수의원 원장이던 우석균 선생이 진료실 뒤쪽의 작은 공간을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우리뿐 아니라 지역사회 운동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성수의원은 서울 한복판에서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구닥다리 인테리어도, 끈끈한 환자-의사 관계도 말이다. 선생은 동네 사람들의 주치의였고, 단골 환자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2000년대 후반 한·미 FTA 반대 투쟁이 뜨겁던 시절, 밤늦게까지 이어진 집회와 뒤풀이로 선생은 진료실에 지각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불만으로 언성을 높이는 환자가 없는 것은 물론,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선생님 출근 시간에 맞춰 환자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이분들은 기어이 선생의 장례식장까지 찾아오셨다. 가난하고 아픈 주민, 병원에 갈 시간과 돈이 없는 노동자들, 투쟁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상한 활동가들에게 이곳만큼 좋은 병원, 이만큼 믿을 만한 주치의는 없었다. 진료실 바깥에서 선생은 사자후를 내는 운동가였지만, 진료실 안에서는 환자 말에 귀 기울이며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함께 노력하는 따뜻한 의사였다.
선생의 장례는 말 그대로 ‘소셜믹스’의 현장이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이들, 앳된 얼굴의 학생,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위장(?)한 사회단체 회원, 관록의 운동권 아우라를 풍기는 어르신들, 점잖게 양복을 차려입은 병원장, 교수, 관료와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지금 현재 서 있는 곳은 다르지만, 모두 인생의 한 시기에 선생과 함께 활동하거나 가까이 혹은 멀리서 가르침을 얻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었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다.
소셜믹스 현장이던 그의 장례식
선생은 격동의 1980년대에 의과대학을 다니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고, 1987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창립을 주도하며 그 행보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이후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과 코로나19 백신으로 상징되는 의약품 접근권 운동, 민간의료보험 도입과 제주 영리병원 설립 및 진주의료원 폐업에 맞선 건강보험 보장성과 공공의료 강화 운동, 한·미 FTA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 이라크전쟁과 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하는 평화운동 등등. 주요한 역사의 길목과 투쟁 현장에서 전략과 이론으로, 때로는 거리 진료소의 의사로서 자리를 지켰다.
보건의료 운동에서 선생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선생의 정세 진단과 운동 전략에 항상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장례식장을 찾은 다른 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이견, 불일치, 다양성이야말로 어쩌면 사회운동이 발전하는 동력일지 모른다. 실제로 선생은 사회운동 내부를 향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모두의 건강권 보장과 평화라는 공통의 목표보다 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를 존경하고 추모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없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학생들을 의식화한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고당한 일화를 회고한다. 그는 사람이 죽는 거랑 해고되는 게 비슷한 점이 있는데, 바로 다른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덕담을 늘어놓는 것이란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정녕 그를 못 잊을 거라든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해고의 장점은, 죽는 것과 달리 이 모든 덕담을 당사자가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당사자만 할 수 있는 농담이다. 추모식에서 많은 사람이 선생을 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많은 이들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대목을 떠올렸다. 선생님이 이걸 직접 들으셔야 했는데, 직접 보셔야 했는데···.
이날 지하철역에서 장례식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장례식장 안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많이 만났다. 조문 온 사실을 깜박 잊은 채 활짝 웃으며 목소리 높여 인사를 나누다 “아차차, 지금 우리 표정이 너무 밝은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이 자리가 ‘운동권 원로’ 우석균 선생의 팔순 잔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선생의 전매특허인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강의를 들으며, 모처럼 만난 옛 동지들과 ‘아유 노인네 기력도 좋으시네’ 뒷담화 나누는 ‘홈커밍 데이’였으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선생은 원로라는, 당신이 싫어했을 이름표를 달아보지 못한 채 64년 짧은 생을 마무리했다. 다른 이들과 사회의 건강을 챙기느라 당신 스스로를 챙기지 못했던 평소의 삶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것이리라. 고인은 이제 무거운 짐을 벗고 편히 잠드시고, 그와 함께 키워왔던 꿈들은 남은 사람들이 조금씩 더 나눠서 질 수밖에.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