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만의 귀향···‘인간 동물원’ 희생자들 집으로 돌아간다[사이월드]

백민정 기자 2026. 6. 23.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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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여 년 전 유럽인들의 구경거리로 전시됐다가 목숨을 잃은 남미 원주민들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프랑스 의회가 과거 이른바 ‘인간 동물원’에 전시됐다가 숨진 남미 원주민 6명의 유해를 고향인 프랑스령 기아나로 반환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건데요. 프랑스 정부 역시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면서,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도심 속 ‘인간 동물원’···문명이라는 이름의 폭력
1905년 벨기에 리에주 만국 박람회에 마련된 ‘세네갈 마을’의 연못.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자료사진

사건은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프랑스 탐험가 프랑수아 라보는 칼리냐족과 아라와크족 원주민 33명을 각종 감언이설로 유인해 파리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일터도, 새로운 정착지도 아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파리 시내에 조성된 이른바 ‘원시 마을’에서 생활하며 관람객들에게 공개됐습니다. 사람들은 입장료를 내고 그들의 일상을 구경했고, 원주민들은 살아 있는 전시물이 됐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 같은 ‘인간 동물원’이 성행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파리, 런던, 브뤼셀 등 주요 도시에서는 식민지 주민들을 우리 안에 가두거나 인공 마을에 살게 한 뒤 대중에게 보여주는 전시가 잇따라 열렸습니다.

인간 동물원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을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로, 유럽인들을 ‘문명화된 우월한 존재’로 대비하며 식민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였습니다. 우리 안에 갇힌 ‘전시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권력의 위계질서는 명확해졌습니다.

1892년 3월 파리 인근 뇌이쉬르센에 위치한 프랑스 최초의 테마파크이자 여가 공원인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에서 열린 ‘카리브해 원주민’ 전시회. 롤랑 보나파르트 촬영, 케 브랑리-자크 시라크 박물관 소장.

낯선 기후와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은 빠르게 건강을 잃었습니다. 33명 가운데 8명이 목숨을 잃었는데요. 당시 프랑스 신문 라 코카르드는 “처음에는 활기차고 생기 넘치던 이들이 몇 달 뒤에는 걷기도 힘들어하며 기침과 신음만 반복했다”“마치 박물관 전시용 해골처럼 변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희생자 가운데는 10대 후반의 임신한 여성 페코페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언론 르 쁘띠 파리지앵은 페코페의 장례 추모식을 “가난한 사람들의 행렬”이라고 묘사하며 “(원주민들이) 짧고 애절한 발걸음과 함께 그의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며 럼주 한 잔을 급히 마셨다”고 전했습니다.

죽어서도 끝나지 않은 전시

비극은 사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숨진 원주민들 가운데 6명은 매장된 지 수년 뒤 다시 무덤에서 꺼내졌습니다.인류학 연구 자료로 활용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들의 유해는 이후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됐습니다.

이번에 반환이 결정된 유해 역시 바로 이들입니다. 성인 남성 4명, 임신한 여성 1명, 청소년 1명으로 확인됐습니다.

법안을 발의한 프랑스령 기아나 출신의 장빅토르 카스토르 의원은 이를 두고 “프랑스 식민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가운데 하나”라며“한 세기가 넘도록 이어진 불의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유해 반환 운동을 오랫동안 이끌어온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법안 통과 직후 눈물을 흘리며 “조상들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1932년 2월2일 런던 그리니치에 있는 드레드노트 선원 병원 옥상에서 환자와 직원들이 서아프리카 멘데족 원주민이 유리 조각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GettyImages/이매진스
아직도 박물관에 남아 있는 식민의 유해들

이번 반환은 상징적 의미가 크지만, 문제 해결의 끝은 아닙니다.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에는 현재 약 2만4000구의 인골이 보관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1200구는 해외에서 유입됐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유해들입니다.

파리 인류박물관에도 1만8000점에 이르는 두개골 표본이 보관돼 있습니다. 알제리의 역사학자 알리 벨카디는 인류박물관을 조사한 뒤 “식민지에서 수집된 두개골들이 신발 상자를 연상시키는 조잡한 골판지 상자에 보관돼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시대 유럽 열강은 전쟁과 식민 통치 과정에서 확보한 인골을 연구 자료나 전시품으로 취급했습니다.박물관들은 오랫동안 이를 인류 전체의 유산이라고 주장했고 각국 정부도 반환 문제를 민감한 외교 사안으로 다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 더 폭넓은 유해 반환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옵니다. 법안을 발의한 장빅토르 카스토르 의원은 이번 조치를 “인간 유해 반환의 길을 여는 첫걸음”이라며 식민지 시기 수집된 인체 유해의 경위를 전면 조사하고 원주민 공동체와 협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130년 만에 되찾는 존엄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전시된 이고로트족. 미국 의회도서관 자료사진

기아나의 민족학자 도미니크 시릴은 칼리냐족이 지금도 대를 이어“이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식민지배 과정에서 땅과 문화를 빼앗긴 상처이고, 다른 하나는 조상들이 인간 동물원에 전시됐다는 굴욕과 그 유해조차 고향으로 모셔오지 못했다는 죄책감입니다.

이번 유해 반환이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인간 동물원에 갇혀 생을 마감한 이들이 겪었던 고통 역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인간의 가치를 우열로 나눴던 역사가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130년 만의 귀향은 단순한 유해 반환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역사의 피해자들이 그 고통을 인정받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되찾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들의 ‘귀향’은 고향으로의 귀환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백민정 기자 mj10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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