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5분" 엎어지면 코 닿는 반도체 원팀, 삼전하닉 아닌 'TSMC의 대만' [르포]
폭우 오는 밤에도 신주과학단지 내 사무실, 공장 등 분주
TSMC·미디어텍 등 반경 1㎞ 집적…설계·생산·인재 연결

【신주(대만)=정원일 최혜림 기자】칠흑 같은 어둠 속 집중호우가 쏟아진 지난 4일 오후 7시. 대만 신주과학단지 내 TSMC 본사 '모리스 창 빌딩' 앞 도로는 퇴근이 아닌 '출근길' 도심을 방불케 했다.
이 곳은 24시간 쉬지 않고 뛰는 대만 반도체 심장부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족쇄와 복잡한 규제에 묶인 한국보다 유연한 노동규제로, 생산성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빗속의 불야성이 묵묵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반경 1㎞ 내 구축한 '초연결 반도체 생태계'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그대로 보여줬다. 현재 한국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사활을 걸고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구축 중이다. 수도권 반도체 벨트 강화는 한반도의 신(新)인계철선으로 '코리안 실리콘 방패'이자,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을 한 차원 격상시킬 프로젝트다. 이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반도체 산업 경쟁국인 대만의 신주과학단지 구축 모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날이 저물고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폭우가 쏟아졌지만,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인 신주과학단지는 오히려 낮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건물 유리창 곳곳에 불이 켜졌고, 저녁 식사를 나르는 배달 오토바이들이 연신 로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야간 조에 투입된 엔지니어들과 교대 근무자들이 뿜어내는 열기였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공장은 멈추지 않았고, 물류 차량은 쉴 새 없이 오갔다.
이 같은 '불야성'은 대만 특유의 탄력적인 노동 정책이 뒷받침된 결과다. 연장근로 한도를 '주 단위(12시간)'로 엄격히 제한하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월 단위(최대 54시간)'로 유연하게 관리한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고객사의 주문이 폭주해 특정 시기나 라인에 업무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파운드리 산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한국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탄력적으로 핵심 인력을 가동할 수 있는 구조다.

굵은 비를 뚫고 모리스 창 빌딩 인근을 수 ㎞ 걷다 보니 TSMC의 핵심 생산 시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열하듯 늘어선 팹(Fab·공장) 곳곳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거대한 공조기가 돌아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주력 12인치 웨이퍼 생산 기지인 'F12 팹' 단지와 차세대 2나노 공정 핵심 거점인 'F20 팹' 단지 모두 대낮처럼 환했다. 작업모를 쓴 직원들을 가득 태운 셔틀버스가 F20 팹 건물을 향해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모습도 포착됐다.


신주의 진정한 무서움은 단순히 앞선 기술력이나 풍부한 노동력에 그치지 않는다. 핵심은 도시 전체가 '24시간 반도체를 위해 호흡하는 거대한 유기체'라는 점이다.
실제로 모리스 창 빌딩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는 대만 대표 디자인하우스인 글로벌유니칩(GUC) 본사가 자리 잡고 있다. TSMC가 최대 주주인 GUC는 고객사의 칩 설계를 최적화해 TSMC 양산 라인과 연결하는 핵심 가교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단 5분(약 1㎞) 이동하자 대만 최대 팹리스 기업 미디어텍 본사가 위용을 드러냈다. 글로벌 톱티어 파운드리와 팹리스, 디자인하우스가 비행기가 아닌 '도보와 자전거'로 이동 가능한 한동네에서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국립칭화대, 국립양명교통대 등 최정상급 연구기관들이 핵심 인재를 끊임없이 수혈하며, 엔지니어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배후 주거단지까지 완벽히 결합돼 있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곧 도시 경제 전체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속도를 내야 할 한국의 '용인 메가 클러스터'가 신주의 속도전과 통합 컨트롤타워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류페이전 대만경제연구원(TIER) 산업경제 데이터베이스 총감은 "신주과학단지는 중앙 부처가 직접 통합 컨트롤타워로 나서 토지·전력·용수·환경평가 등 복잡한 난제를 신속히 조율하고, 지방정부 역시 TSMC 유치를 최대 정치적 성과로 여겨 규제 타파에 앞장선다"고 설명했다. 이어 "반면 한국은 기업과 지자체, 국회, 규제기관 간의 이해관계 조정 방정식이 지나치게 복잡해 대만 특유의 '반도체 국가대표 원팀 체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냉정한 평가가 나오는 것이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one1@fnnews.com 정원일 최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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