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부엌데기, 18살 여공, 해고자…요양보호사 김두숙의 유산

2004년 어느 가을 한낮, 두숙은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며 얼른 수화기를 들자 아들이 말했다.
“도서관에서 ‘민주노조 10년’이라는 책을 보는데 엄마 이름을 보았어요. 이 책에 나오는 사람, 엄마 맞아요?”
“어, 그래. 원풍노조 이야기면 엄마 맞다.”

정작 그 책을 본 적이 없었던 두숙은 정신이 번쩍 났다. 곧장 동료 화숙에게 연락해 ‘민주노조 10년’(섬유직물업체 원풍모방 노조 역사 기록서, 1988년)을 빌려 몇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사는 게 바빠 무심코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아들의 전화 한통 덕분에, 두숙의 발걸음은 오랜 세월 가슴속에만 눌러 두었던 ‘원풍동지회’로 향하게 되었다.
1960~70년대 농촌 형편이야 다들 비슷했다지만, 아버지가 시각장애로 가장 노릇을 하기 어려웠던 두숙네는 더욱 빈곤했다. 땅뙈기 하나 없어 어머니가 가장이 되어 동분서주해야 했다. 두숙은 밥상의 반찬조차 구분하지 못해 국에 다 말아 드시는 아버지의 눈이 되어 어린 나이에 집안 살림을 맡았다.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는 어느 날 식구들을 이끌고 친구가 두부 장사를 하는 철원 장터 근처로 이사해 문간방을 얻어 두부를 만들었다.
두숙은 아버지의 길잡이가 되어 함께 산에 올라 콩을 삶을 땔감을 긁어모았다. 성품이 온화한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긁어모았지만, 아버지 지게에 담긴 건 잡목과 가시투성이였다. 긁히고 찔린 아버지의 얼굴과 팔다리는 성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지고 내려온 거친 땔감으로 어머니는 부드러운 두부를 만들어 식구들을 건사했다. 어머니는 새벽에 나가 두부를 팔거나 근처 군인들을 대상으로 밥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두숙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이 산더미였다. 두부를 머리에 이고 십리 길을 걸어 군부대로 배달을 가기도 했다.
억척스러운 어머니 덕에 드디어 집을 사서 이사하고 살림이 펴지나 싶던 순간, 오빠가 병에 걸렸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던가. 아버지의 시력마저 더 나빠지면서 그동안 모은 돈은 물 새듯 빠져나갔다.
어머니의 모진 화풀이는 늘 두숙의 몫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회초리가 어린 몸에 붉은 줄을 그었다. 죽어라 때려놓고는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는 어머니가 당시 두숙의 눈에는 악마 같아 보였다. 붉고 푸르게 멍든 두숙의 등에는 일곱살 터울의 어린 동생이 늘 업혀 있었다. 아기는 왜 그리도 자주 오줌을 싸대는지, 친구들과 놀 시간은 도무지 나지 않았다.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도 하고 싶고, 동네를 달리며 술래잡기도 하고 싶었던 철부지 누나는 쉴 틈이 없는 상황이 속상한 끝에 묘수를 떠올렸다. ‘그래, 동생 고추를 묶어두면 오줌을 안 싸겠지.’
두숙은 바느질 통에서 실을 꺼내 잠든 아기의 고추를 실로 칭칭 동여매 두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자미를 던지고 땅을 짚으며 정신없이 풀풀 뛰어놀았다. 퍼뜩 정신이 들어 집으로 달려간 저녁, 그날 두숙은 정말이지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어머니가 집에 와보니 애를 보라던 딸은 간곳없고, 아기는 새파랗게 질려 울고 있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왔기에 망정이지 정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었으나 서럽기만 했다. 그 동생이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무탈하게 아이를 낳기 전까지, 두숙은 내내 가슴을 졸이며 노심초사해야 했다.
집안일에 치여 가다 말다 했던 학교에서 어느 날 백일장이 열렸다. 두숙은 ‘악마, 우리 엄마’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상을 받았다. 훗날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오빠를 통해 그 글을 읽은 어머니가 방에서 남몰래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이가 들고 철이 나면서 ‘나마저 없었으면 우리 엄마는 그때 정말 죽었겠구나’ 싶어 마음이 아렸지만, 당시에는 어떻게든 벗어나고만 싶은 가족이자 집이었다.

1976년, 열여덟살이 된 두숙은 고향 친구를 따라 섬유직물공장으로 유명했던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열명이 넘는 이들이 한방을 쓰는 게 처음엔 걱정이었으나, 기숙사에 더운물이 펑펑 나오는 목욕탕이 있는 것을 보고는 황홀할 지경이었다. 먼지가 날리는 작업장과 귀를 찢는 소음마저도, 지긋지긋한 집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마냥 좋기만 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집이었건만, 월급날이 되면 어김없이 발걸음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눈은 이제 희미하게 물체만 구분하는 정도가 되었고, 오빠는 병세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동생은 아직 너무 어렸고 어머니는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이제 집안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두숙 혼자뿐이었다. 열살에 집안 살림을 도맡았던 아이는, 열여덟에 온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이 되었다.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은 모두 외면한 채 버틴 두숙과, 백방으로 뛰어다닌 어머니의 정성으로 오빠는 기적처럼 완치되었다.
그즈음 두숙에게 새로운 사회가 열렸다. 노동조합이었다. 노조 소그룹 활동과 탈춤반 활동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가슴속 흥을 남김없이 끌어내 주었다. 공장 옥상에서 밤낮으로 연습하다 출근하면 종아리에 알이 배어 화장실에 쪼그려 앉는 것조차 고역이었고, 잠은 늘 모자라고 근육은 시큰거렸지만, 사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첫 탈춤 공연에서는 어용노조 지부장 역할을 맡는 바람에 무대 위로 관객들의 욕설이 바가지로 날아왔지만,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니 고생했다는 칭찬과 격려가 또 한 바가지 쏟아졌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워지면서 노조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따뜻한 온기가 두숙을 감쌌다.
그러나 민주노조 활동의 대가는 가혹했다. 1979년 민주인사들이 기획한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는 노조에서 나눠준 토큰을 들고 다섯명씩 짝을 지어 참석했다. 시국 성명이 강당에 울려 퍼지는 순간 백골단이 대거 진입했고, 두숙은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모진 고문과 폭행, 그리고 열흘간의 구금을 겪어야 했다. 그때 생긴 왼쪽 허벅지의 통증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찬 바람만 불면 어김없이 도지곤 한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노조 간부들에게 수배령이 떨어졌고, 공장 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군인들이 들락거렸다. 결국 계엄합동수사본부는 노조 간부들을 대거 연행해 갔다. 노조 대의원이자 탈춤반 총무였던 두숙도 끌려갔고, 그렇게 원풍노조의 열여섯명 해고자 중 한명이 되었다.
그 후 어떻게든 살아보려 방적 기술을 앞세워 방림방적의 문을 두드렸으나, 원풍모방 해고 경력이 발목을 잡아 입사를 거절당했다. 대한모방에는 어찌어찌 기숙사까지 들어갔으나, 단 하루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렇다고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원풍모방 시절의 동료들이 그리워 공장 앞을 서성였지만, 자신을 만났다는 이유로 한 친구가 회사에 시말서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감히 찾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모든 게 암담했다. 딱하게 여긴 동네 할머니의 성화에 밀려 청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간 맞선 자리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는 삶의 길을 어떻게 올바르게 선택할지 치열하게 고민했건만, 정작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신중하지 못했다. 노조에서 배운 대로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며 동네 주민들과는 잘 지냈지만, 한집에서 사는 남편과는 자꾸만 어긋났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하루하루를 견디다 결국 결별을 택했다. 사는 게 너무 고단해 과거의 소중했던 인연들과도 연을 끊다시피 한 채, 홀로 웅크리고 살았다.
그렇게 잊히는 줄 알았던 삶의 한 페이지를, 어미 이름을 책에서 찾아낸 아들의 전화 한통이 다시 깨웠다. 마침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과거사 정리가 시작되면서, 원풍모방 노조를 국가가 부당하게 탄압하고 파괴했다는 진실이 입증되었다. 두숙 역시 당당히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과거의 동료 중에는 활동 당시 동향을 감시하던 경찰 때문에 뒤늦게 이력이 드러나, “빨갱이가 들어와 집안을 망치게 생겼다”는 시가의 모진 박해를 받아 생때같은 아이를 빼앗긴 채 이혼당한 이도 있다. 민주화운동인증서를 품에 안고도 축하해 줄 가족이 없어 쓸쓸하다는 그 동료가 가슴 아프다.
그에 견주면 두숙은 참으로 감사하게도 자식들의 든든한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다. 지금은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늙고 병든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었던 지난날을 지나, 이제는 누군가를 돌볼 여력이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십여년 전, 자녀 모임에 참석했던 딸은 원풍노조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기꾼도, 살인자도 아닌,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어!”
분노하며 눈물 흘리던 딸은, 어느 날 원풍 동지회 자녀 모임에서 만난 한 청년의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소중했던 시절 인연이 대를 이어, 동료와 사돈이 되는 경사가 일어난 것이다.
두숙이 뒤늦게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 알뜰히 공부를 도와주고 시험 날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던 속 깊은 딸은, 이제 제 어미와 시어미의 민주화운동증서를 예쁜 액자에 담아 거실 벽에 걸자며 너스레를 떤다.
“엄마랑 시어머니는 정말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야.”
자식들의 칭송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또 다른 기억도 스친다. 언젠가 다른 공장에서 노조 위원장으로 일했던 고향 친구를 만나 원풍노조 시절 이야기를 꺼냈을 때, 친구는 두숙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앞에서 싸워준 덕분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거야. 고생했어. 정말 고맙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이거면 되었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불장은 ‘남의 떡’…주식투자 10명 중 6명 ‘1천만원 미만’ 보유
- 지게차 깔려 숨진 26살 예비아빠…재계약 앞두고 반깁스한 채 출근
- [단독] 윤석열, 비상계엄 당일 ‘명태균 구속기소’ 확인 뒤 박성재 호출
- 정청래·김민석 지지층 ‘멸칭 비방전’ 과열…중진들 “분열 키워 뭐가 남나”
- 미 재무 “이란 원유 거래 60일간 허용…IAEA 핵사찰단 재입국 합의 덕”
- “박성재, ‘명태균 사건 무마용’ 계엄 인식…실패 뒤 수사 대응 위해 직권남용”
- ‘반도체발 자산 격차’ 우려 불식하려면…금투·보유세 정상화가 시금석
- 하이닉스, 시총 2080조원 사상 첫 1위…삼성전자, 25년 만에 밀려나
- [단독] “검찰, 내란 관여 정황 있으나 수사 안 이뤄져”…박성재 판결문 적시
- 서울시, 지하철 무임승차 70살로 상향 추진…노인 버스비 지원도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