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껍질’에 사는 ‘거지 슈퍼맨’…반도체 호황 대만, 남일 아니다

이정연 기자 2026. 6. 23.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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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발 격차사회]
‘반도체 호황의 역설’ 대만의 현실
대만 현지인과 이주노동자들이 5월1일 세계 노동절 집회에서 다양한 요구 사항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타이베이/EPA 연합뉴스

“대만 경기가 좋다는 뉴스들이 나올 때마다 길 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요. 정말 좋은 게 맞냐고요. 반도체 회사나 공장이 밀집한 지역은 사정이 좀 나으려나요?”

대만 경제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호황을 타고 16년 만의 고성장 국면에 들어섰다. 하지만 대만 타이베이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천의 일상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캥거루족’인 35살 천은 독립은 무리라고 했다.

“방 하나짜리 집을 빌려 생활하려면 월세와 기본 생활비로 2만5천대만달러(약 121만원)는 족히 나가요.” 직장 생활 7년째지만 월급이 4만5천대만달러(약 217만원)인 그는 결혼도, 아이 낳기도 거의 포기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티에스엠시(TSMC)가 끌어올린 ‘부자 대만’의 숫자 뒤에서, 대만인들은 비싼 집값과 낮은 임금, 생활비 부담에 억눌려 자신들이 발 디딘 대만을 ‘귀도’(귀신만이 살 수 있는 섬)라고 자조하고 있다.

대만 경제지표를 보면 호황은 분명하다. 대만 행정원 주계총처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55% 성장했다. 48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대만 중앙은행은 지난 18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9.45%로 올려 잡았다. 전망이 현실화하면 대만은 2010년(10.25%) 이후 16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게 된다.

성장을 끌어올린 것은 인공지능 특수다. 대만의 지난 5월 수출은 전년 동월보다 51.7% 증가해 월간 기준 역대 두번째 규모를 기록했다. 전자부품 수출은 66.9%, 정보통신 제품 수출은 118% 급증했다. 대만의 반도체와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세계 인공지능 열풍의 핵심 수혜지로 떠오른 결과다.

이런 숫자는 대만 시민들의 체감 경기와 어긋난다. 대만 소비자신뢰지수는 올해 5월 62.08로 전월 62.47에서 하락해 2023년 1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 지수는 대만 국립중앙대학 대만경제발전연구센터가 국내 경기와 가계 경제, 고용, 물가 등에 대한 소비자 기대를 종합해 산출하는데, 100을 밑돌면 비관적 인식이 우세하다는 뜻이다. 미용 서비스업을 하는 마오가 실감하는 경기와 다르지 않다. 그는 “지난해부터 경기가 좋아진다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은 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장사가 잘되면 업장 규모를 늘려보려고 했지만 마음을 접었다.

“유명한, 소수의 몇몇 회사 사정이 좋아진다고 보통사람들 주머니가 두둑해지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느끼고 있다.” 이런 마오의 푸념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경제 규모는 빠르게 커지고 있지만,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정체되어 있다. 국내총생산에서 피고용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율인 노동소득 분배율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만 노동소득 분배율은 1990년대까지 50%에 이르렀지만, 이후 점차 줄어 2024년 43%까지 떨어졌다. 대만의 2025년 월평균 임금은 6만4천대만달러(약 310만원)로, 한국(420만원)의 약 73%에 그친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한국을 앞질러 4만달러를 돌파했지만, 노동자의 임금 사정은 한국보다 열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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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간 격차도 점점 커지고 있다. 티에스엠시와 미디어텍, 폭스콘 같은 첨단기업 종사자들은 인공지능 특수의 과실을 누릴 수 있지만, 서비스업과 전통 제조업, 비정규·저임금 청년층은 고성장의 혜택에서 멀다. 한쪽 산업과 계층은 급성장하지만, 다른 한쪽은 정체되거나 아래로 밀려나는 구조다. 대만 안팎에서 이를 두고 ‘케이(K)자형 경제’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대만 중앙은행은 이런 지적에 대해 “전통 산업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전자산업의 성장세가 지나치게 강한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경제 전체의 평균값과 시민들의 체감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괴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주거다. 대만 청년들 사이에서는 ‘계란 껍질 구역’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타이베이 도심을 계란 노른자, 그 주변을 흰자에 비유할 때, 집값을 감당하지 못한 청년들이 더 바깥쪽 외곽 지역, 곧 계란 껍질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집을 사기는커녕 월세와 통근 비용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빠듯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도 타이베이의 중위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은 16배로,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보다 높다.

청년들의 생활 방식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최근 대만에서는 ‘거지 슈퍼맨’이라는 말이 주목받았다. 편의점 앱으로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되는 도시락과 신선식품 재고를 확인한 뒤, 정해진 시간에 매장으로 달려가 물건을 사는 ‘청년 알뜰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물가를 아끼기 위한 합리적 소비라는 평가도 있지만, 국가 경제가 기록적인 호황을 보이는 가운데 청년들이 할인 도시락을 찾아 뛰어다니는 모습은 성장과 일상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팍팍한 삶은 출산율 저하로 이어진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결혼 5년차 린(42)은 아이는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학교 동창 5명 가운데 3명이 결혼을 했고, 자녀를 둔 친구는 1명뿐”이라고 했다. 지난해 대만 출생자 수는 10만7812명으로 10년 연속 최저치를 기록했다. 합계출산율(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은 사상 최저치인 0.695명이 됐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지난달 28일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800억대만달러(약 18조원)를 투입하는 ‘대만 인구대책 신전략’을 발표했다. 그는 육아를 사회와 기업 및 국가가 공동으로 지원하는 ‘공공지원형 육아’ 시스템으로 전환시키겠다고 했다. 린은 이런 대책에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했다. “사회의 지원 확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관건은 각 가정의 경제적 안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만에 있는 티에스엠시(TSMC) 공장에 로고가 전시된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대만은 반도체 산업이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산업과 지역, 직종 간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대만의 독립 연구단체인 공력연구사는 보고서에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기업의 영업이익은 연평균 약 4%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노동임금 상승률과 비슷한 수준을 보였지만,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영업이익은 7%로 급증한 반면, 노동임금 상승률은 약 4%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격차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 특히 비전자산업 종사자들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고 짚었다.

대만 사회의 고민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위험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주거 안정, 임금 상승 등으로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다. 수출 대기업과 첨단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전체 가계와 지역사회로 확산되지 못하면, 고성장은 오히려 양극화를 키울 수 있다. 대만 정부도 이를 의식해 현금 지급, 임금 인상, 청년 주거 지원, 사회주택 확대 등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일회성 한시적 지원 사업으로는 구조적 양극화를 완화하기 어렵고, ‘부자 대만, 가난한 대만인’이라는 역설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도 낯설지 않은 고민이다. 한국 역시 반도체 수출 호황이 성장률과 주식시장을 끌어올리는 한편, 청년층은 높은 집값과 불안정한 일자리, 낮은 체감 소득을 호소하고 있다. 대만은 한국보다 먼저 인공지능·반도체 호황의 급류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성장의 과실이 사회 전체로 퍼지지 않을 때 어떤 균열이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먼저 온 미래’이기도 하다.

베이징/이정연 특파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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