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간 ‘세계 경제 대통령’... 그린스펀 100세로 눈 감다

김신영 기자 2026. 6. 22.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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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美연준 의장, 대통령 4명 거쳐
블랙먼데이, 9·11 충격 극복 주도
금융위기 불씨 키웠다는 비판도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1974년 9월 29일 워싱턴에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1990년대 미국의 호황을 이끌어 ‘마에스트로’로 불린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이 22일 10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배우자이자 NBC 기자인 안드레아 미첼은 이날 그린스펀이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워싱턴 DC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인 1987년부터 글로벌 금융 위기 발생 직전인 2006년까지 18년 6개월 동안 연준 의장으로 일한 그린스펀은 ‘세계 경제 대통령’ 역할을 잘했다는 명성과 함께 거품의 불씨를 키웠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그린스펀은 재임 중 레이건,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 공화당·민주당을 아우르는 미국 대통령 네 명을 거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린스펀은 냉전 후 가장 중대한 경제계 인물로 중앙은행 수장으로서는 드물게 큰 명성을 떨쳤다”고 했다.

편모 아래 외동아들로 자란 그린스펀은 독특한 개인사(史)로도 관심을 끌었다. 어린 시절 철도 시간표와 야구 통계를 파는 ‘은둔형 소년’이었던 그는 색소폰과 클라리넷에 재능이 있어 명문 음악 학교인 줄리아드에 입학하기도 했다. 스스로 “직업 예술가가 되기엔 부족했다”며 연주자의 길을 포기한 후 뉴욕대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월가에서 경제 컨설턴트, 제럴드 포드 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유명한 폴 볼커의 후임으로 연준 의장에 발탁됐다.

그린스펀은 삶의 궤적만큼 통화 정책에 대한 철학과 평가도 큰 변화를 겪었다. 취임 직후 발생한 미국 주식 시장 폭락 사태인 ‘블랙 먼데이’ 당시엔 과감한 자금 공급으로 사태를 진화했다. 시장이 폭락하면 중앙은행이 붕괴를 막아준다는 ‘그린스펀 풋’이란 용어가 이때 나왔다. 이후 아시아 외환위기, 닷컴 버블 붕괴, 9·11 테러 등 대형 경제 위기가 터질 때마다 적극적이면서도 정교한 금리 조절로 시장 충격을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명 언론인 밥 우드워드는 그린스펀의 전기를 쓰며 시장을 ‘지휘하는 자’라는 의미로 ‘마에스트로(Maestro·거장)’란 별명을 달아주었다.

그린스펀의 불투명한 수사와 모호한 화법은 악명과 명성을 모두 안겼다. 월가의 전문가들과 경제 기자들은 그린스펀 발언의 숨은 뜻을 해석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린스펀은 이런 반응에 “내 말을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당신은 내 말을 오해한 것”이라는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퇴임 후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자, 과도한 금융 완화가 결과적으로 경제 위기라는 재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거품’을 키웠다는 비난도 받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린스펀은 자유시장 경제의 정신을 세우고 구현한 인물”이라면서도 “미국 대형 은행의 연쇄 파산과 대규모 실업을 유발했던 금융 위기가 그린스펀의 평가에 그림자를 계속 드리울 것”이라고 했다.

22일 100세로 세상을 떠난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생전인 2009년 뉴욕에서 한 행사에 참여한 모습. /신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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