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누정원림 나주-양벽정] 조선 중기 당대 문사들의 교유·학문의 공간
조선시대 학식 높은 선비 홍징 건립
양산보·정철 등과 학문·문학적 교류
단층 팔작지붕·솟을 대문 고고한 기운
당대 문사·후손들의 19개 시문 묵향 그윽
나무·화초 어우러진 정원 자연과 조화
2013년 향토문화유산 35호 지정

누정은 홍징이 1587년에 건립했다. 본관이 풍산인 홍징은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 식년시에 2등으로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양산보, 정철, 최시망 명현들과 학문적, 문학적 교류를 할 만큼 학식이 뛰어난 선비였다.
오늘 행선지는 양벽정. 이름만으로도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정자가 있는 마을을 에워싼 산자락이 아슴하게 그려진다.
예상했던 대로다. 이맘때는 푸르름이 마을에 넘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특유의 고풍스러움과 고적한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오래 전에 왔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묻어난다. 아마도 시간의 은전 때문일 것이다. 늘 그렇듯 시간은 대상에 대한 윤색을 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오래된 것들에서 발현되는, 누대를 거슬러 이어온 전통의 힘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전통은 고루하거나 무언가를 옥죄는 규율이 아니다. 세상의 법도와 사람살이의 인정이 맞물려 더불어 살아가는 정리를 이루는 도다.
오늘날 세상이 무법천지로 변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은 전통의 가치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에 대해 낡은 사상이나 관념쯤으로 치부하는 풍조가 낳은 폐해다. 현실의 많은 문제와 윤리의 타락의 기저에는 근본과 근간의 상실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도래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소개하는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다. 양 옆으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서 있다. 해학적이기보다 귀여움과 발랄함이 깃든 요즘 트렌드에 부합하는 인상이다.

“도래마을은 노령산맥의 서기(瑞氣)를 이어받은 식산(食山)이 마을의 주산이 되고, 남쪽으로 한 자락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의 감태봉이 있으며, 서쪽에는 용(龍)이 송호에 꼬리를 담그고 있는 형국의 박령산이 있어 마을 앞뒤로 용호(龍虎)가 기세를 펴는 형국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인물이 많이 나오는 고장이다. 물줄기가 내 천(川)자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도천(道川)-도내-도래로 변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1, 2, 3구 일곱 동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앞뒤로 용호(龍虎)가 기세를 펴는 형국”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자연환경이 고전적인 명촌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물산이 풍부하고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는 것은 그만큼 천혜의 환경을 구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옥토에서 특산물이 출하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마을을 둘러보고 양벽정으로 들어선다. 단층의 팔작지붕이 화려하면서도 검박한 모습이다. 골기와를 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구조다. 여기에 3칸의 재실이 있으며 입구는 솟을 대문 형태로 외관부터 범상치 않다. 고고한 기운이 느껴진다. 보통의 누정은 출입문이 없거나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소박한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곳의 솟을 대문은 전체적으로 양벽의 외관과 규모, 가치 등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왼편의 정원은 사람의 손을 별로 타지 않은 듯 자연 그대로다. 나무와 화초가 버성기듯 어우러져 있다. 성하의 계절이라 비온 뒤 죽순처럼 무성한 잎들로 정원은 생명력이 가득하다. 자연과 인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분위기에서 누정을 지은 이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른쪽 정내의 빈 공간에는 양벽정을 소개하는 표지판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양벽정은 1587년(선조 20) 현 위치로부터 10여 리 떨어진 화포(현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2구 복구마을 앞)에 홍징(洪澄 1515-1593)이 창건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누정이 퇴락을 하게 되자 1946년 후손 홍찬희 등에 의해 현 위치에 중건을 시작해 1948년 완공했다. 당시 문 앞에 연지를 조성하고 이층 누각대문을 건립했다. 모두 19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홍안식, 홍준희 등 홍징의 후손 15인의 시문이다.

누정의 명칭을 양벽정이라 칭한 것은 최시망의 ‘양벽정기’에 “이곳의 물이 이 산의 남쪽으로부터 정자 아래로 돌아와 그대로 어우러져 출렁이고 백옥처럼 희고 쪽물처럼 푸른 승경을 이루었기에 이곳의 정경을 감안하여 이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라고 기술돼 있다.
누정의 내력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홍징의 후손 홍찬희가 쓴 ‘양벽정중수기’를 참조하면 된다.
“옛날에 이 정자는 이 고을 동쪽에 있는 화포라는 땅의 운호 위에 자리하여 푸른 산 맑은 물이 앞뒤로 둘러 있어 아주 상쾌한 장소였다. 그래서 나의 선조이신 동강 참의공이 이곳을 자주 찾아 그 경치를 즐겼다. 이때 시대의 유명한 선비인 소쇄 양처사, 정 송강, 조 중봉 등의 여러 선생이 부군과 깊은 교유를 맺고, 어느 날 양처사의 소쇄원에 모여 부군의 이러한 은거 한량적인 높은 행적을 거론하며 출처의 정도를 지킨 아주 올바른 처신이었다고 극찬하였다” (한국학호남진흥원, ‘나주 누정’, 2005)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자는 자연스레 이전의 상태보다 쇠퇴를 한다. 홍찬희는 이에 대해 “여러 자손이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관리상의 문제가 생겼다”며 “이 정자가 저절로 무너져 수백 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으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일본 왜적들이 물러나고 그다음 해인 병술년(1946) 겨울에 최초로 정자 터를 닦고 다음 해인 정해년(1947)에 건물을 세우기 시작해서 무자년(1948)에 완공하여 낙성을 마쳤다”고 기록했다.

홍병희가 지은 7언 절구 시편이 누정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듯하다. ‘정자를 옮겨 세운 뒤 원운을 써서 공경히 차운하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기다란 띠 같은 물결 남실대는 봄날
모든 냇물 바다로 향하듯 조상 흠모하네
풍악을 내려다보니 조상의 음덕 두터울 뿐
후예들 넉넉한 향기 사람들에게 발하네
한편 양벽정 인근에는 영호정(永護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중종 때 남평현감인 휴암 백인걸이 건립했으며 나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4호로 지정돼 있다. 학문 진작을 위해 설립한 4개 학당 가운데 하나인 도천학당의 역사를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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