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창업자들 배신한 ‘모두의 창업’ 사태

지난 19일 새벽 2시가 지난 시각에 기자의 휴대폰으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가상현실(VR) 인테리어 스타트업을 하다 실패의 아픔을 겪은 한 재기 창업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창업 실패로 아내 명의 집까지 가압류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중소벤처기업부의 대국민 창업 오디션 ‘모두의 창업’에 도전했다고 했다. 6만3000명이 몰렸고, 심사를 거쳐 1차로 합격자 5000명이 추려졌다. 다행히 그도 합격해 재기의 기회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합격자 5000명 전원의 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터진 것이다. 그는 “너무 불안하다”고 했다.
전말은 이렇다. 지난 15일 합격자 프로필이 공개된 직후 합격자들의 이메일 주소와 아이디어 요약, 심사평 등 비공개 정보가 외부자에 의해 무단으로 열람됐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실명·전화번호·상세 사업계획은 유출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아이디어 요약’은 단순한 몇 줄 자료가 아니다. 아직 특허로 보호받지 못한 초기 창업자의 독창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그들의 전 재산이자 대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정부가 아이디어 임치(任置) 제도까지 운영하는 이유다.
사고 이튿날인 16일에는 한 합격자가 특정 업체로부터 홍보 메일을 받았다는 사실이 추가로 알려졌다. 이메일을 보내온 업체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이번 사업을 위해 제휴를 맺은 인공지능(AI) 솔루션 공급사였다. 창업자들이 심사받기 위해 제공한 정보가, 정부가 추천한 협력사의 타깃 영업 리스트로 유용된 셈이다.
한 벤처 업계 인사는 소셜미디어(SNS)에서 “모두의 창업은 모두의 창업 아이디어를 정말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창업 생태계를 진흥시키겠다는 거창한 명분의 공공 사업이, 창업 도전자들의 아이디어 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조차 해내지 못한 것이다.
이번 유출 사태를 두고 청년 창업자들은 SNS에서 탄식을 쏟아냈지만, 정작 제도권의 누구도 선뜻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정부 예산이 생사를 가르는 판에서 누구도 정부와 각을 세우지 못하는 탓이다. 공공 주도 사업의 규모가 생태계를 압도하면, 시장의 건강한 자정 작용도 멈출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두의 창업’은 출범과 동시에 대규모 인원이 몰리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 정부 사업도 흥행은 신뢰가 뒷받침될 때만 지속된다. 이번 유출의 피해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정부 설명과는 별개로, 창업자들이 정보 관리에 의구심을 갖게 된 것 자체가 이미 신뢰에 흠집이 난 셈이다. 창업으로 재기하려는 이들에게 다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정부는 이번 사태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리고 구체적인 재발 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
마침 이 사업을 주도한 한성숙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25~26일 열린다. 혹시라도 이를 의식해 정부가 이 문제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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