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넘으며 부르던 그 노래...6·25가 남긴 국민가요 ‘전우야 잘 자라’

아르떼 2026. 6. 2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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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준희의 점입가경(漸入歌景)-노래의 풍경 속으로
화랑 담배 연기처럼 흐릿한 <전우야 잘 자라> 음반의 자취

사변(事變)일까, 동란(動亂)일까, 전쟁일까. 1950년 6월에 시작해 3년 이상 이어진 끔찍한 살상과 파괴의 시간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공포와 피폐로 기억되는 70여 년 전 그 사건에서, 우리가 얻은 것이 달리 또 있을까. 아직 종결되지 않은 비극의 산물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거창하거나 실없는 의문이 아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듣고, 부르는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다. 6·25가 남긴 단 하나의 노래를 꼽자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그 곡, <전우야 잘 자라>다. 군가 같기도 하고 대중가요 같기도 한 이 노래에는 이야깃거리가 꽤 많다.

1949년 봄부터 이듬해 6월 전쟁 발발 전까지 럭키(Lucky)레코드에서 발표한 <신라의 달밤>, <낭낭 십팔세>,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 만리> 등으로 경이로운 연속 히트를 기록해 최고의 콤비가 되었던 유호(兪湖)와 박시춘(朴是春). 당대를 풍미한 인기 작사가, 작곡가였던 두 사람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남쪽으로 피란하지 못했다. 박시춘은 서울 동쪽 아차산 자락 은신처에 숨어 지내며 이따금 시내를 오갔고, 유호는 바로 강 건너편 광주 친척 집으로 잠시 피했다가 부득이 서울로 돌아와 ‘인공(人共) 치하’ 석 달을 버텼다.

드디어 북한군이 서울에서 물러난 직후인 10월 어느 날, 두 사람은 오랜만에 명동 거리에서 만났다. 박시춘은 유호를 찾아갔다 했고, 유호는 박시춘을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살아서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다. 무사히 재회한 기쁨에는 거나한 술이 따랐고, 안도와 분노가 범벅이 된 취흥은 노래 만들기로 이어졌다. 박시춘은 곡뿐 아니라 가사 일부도 자신이 썼다 했고, 유호는 그에 대한 언급 없이 네 절 가사를 한달음에 썼다고 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이번에도 알 수 없다. 그렇게 <전우야 잘 자라>가 만들어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구(赤狗)를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1980년대까지 아이들 고무줄놀이에서도 불렸을 만큼 흔히 들렸던 노래이지만, 처음 발표된 당시 가사를 보면 뜻밖에 익숙지 않은 대목도 몇 군데 있다. 제1절에 등장하는 ‘적구’는 이후 ‘적군’으로 바뀌어 불리곤 했는데, 북한군을 ‘붉은 개’로 표현한 데에서 1950년 가을 무렵 대중의 생각과 언어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노래가 완성되고 나서 얼마 뒤, 박시춘은 국방부 정훈국에서 편성한 문예중대에 촉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박시춘의 요청으로 유호 역시 중대원이 되었고, 둘이 함께 만든 <전우야 잘 자라>도 1950년 12월 8일에 간행된 정훈국 <정훈주보>에 실려 정식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며칠 앞서 12월 2일에는 문예중대 제2소대, 일명 ‘가협(歌協)’의 창립 공연이 열렸고, 신작 군가 <전우야 잘 자라>가 행사를 대표하는 노래로 연주되었다. 공연 첫날에 참여한 여러 가수 중 남인수(南仁樹)가 <전우야 잘 자라>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각을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대신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공연과 지면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한 <전우야 잘 자라>는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노래가 되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막론했고, 남녀와 노소를 불문했다. <애국가>처럼 매일 들리는 노래였고, 가수 선발 대회에서 참가자 모두가 불러야 하는 지정곡이었다.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같은 가사가 너무나 감상적이라 사기 진작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는 비판이 한때 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전우야 잘 자라>는 시대를 대변하는 만인의 노래였다.


그런데, 전시 최고의 히트곡인 <전우야 잘 자라>를 그 당시 소리로는 지금 들을 수가 없다. 현존하는 <전우야 잘 자라> 녹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휴전이 되고도 한참 뒤인 1967년 9월에 발매된 LP음반 전집 <가요 반세기>에 수록된 가수 현인(玄仁)의 노래다. <가요 반세기> 해설서에 1952년 부산에서 현인이 녹음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그런 음반이 실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1951~52년 무렵 부산 코로나(Corona)레코드와 대구 오리엔트(Orient)레코드 등이 SP음반을 제작하기는 했으므로 <전우야 잘 자라> 정도의 노래이면 음반 발매가 이루어졌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전우야 잘 자라>보다 며칠 앞서 박시춘이 작곡했다고 하는 노래 <승리의 용사>가 1951년에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던 것은 실물 자료로 확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우야 잘 자라> SP음반의 자취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현인이 처음 녹음한 것이 맞는지 알 수도 없고, 그저 누가 본 것 같다는 ‘카더라’만 흐릿하게 떠돌고 있을 뿐이다.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 전우 가운데 많은 수가 아직 확인도 되지 않은 채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스러져 흙이 되어 가는 유해를 찾아 모시는 작업이 그래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노래를 찾는 사람인 나는 <전우야 잘 자라> 첫 음반의 흔적을 여전히 더듬고 있다. 언젠가 먼지 잔뜩 묻은 음반을 찾아 손으로 닦아 보면, 노래 속 그들의 얼굴도 좀 더 또렷이 떠오를 것이다.

이준희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