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류문명의 여정] 푸에블로, 두 개의 기억 원주민 공동체와 비운의 푸에블로호

서양의 근대 문명이 북미 대륙에 도달하기 전, 이 땅에는 600개가 넘는 원주민 종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 바로 푸에블로(Pueblo)족이다.
'푸에블로'라는 이름은 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1540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지금의 미국 뉴멕시코주 리오그란데 강 유역에 들어섰을 때, 질서 있게 자리 잡은 마을 공동체를 보고 스페인어로 '마을'을 뜻하는 푸에블로라 불렀다. 외부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공동체 중심의 삶을 이어온 이들의 정체성을 뜻밖에도 잘 담아낸 말이었다.
나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푸에블로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여러 유적과 마을을 찾아다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 유적으로 알려진 차코 캐니언, 70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타오스 푸에블로 마을에서 느꼈던 감동은 아직도 선명하다. 거센 바람에 붉은 흙먼지가 얼굴을 때리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묵묵히 삶의 터전을 지켜온 이들의 건축술과 따뜻한 환대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슬레타 푸에블로 마을에서의 경험도 잊을 수 없다. 마을 성당 앞을 지나던 중, 울려 퍼지던 성가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믿음의 형태는 달랐지만, 그 고요한 울림 속에서 나는 공동체가 지닌 힘을 느꼈다. 푸에블로 마을에는 정복자들이 세운 성당이 나란히 서 있다. 이는 강요된 개종의 흔적이지만 원주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푸에블로'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1968년 1월, 한반도 동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미국 정보함 한 척이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그 배의 이름이 바로 '푸에블로 호'였다. 승조원 82명과 함께 사라진 이 사건은 순식간에 냉전의 긴장을 극대화시켰다. 미국은 공해상에서의 불법 납치라고 주장했고, 북한은 영해 침범에 대한 정당한 조치라고 맞섰다. 항공모함과 전략자산이 동해로 집결하며 전운이 감돌았지만, 동시에 물밑에서는 외교적 접촉도 이어졌다.
당시 억류된 승조원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판문점에 주둔한 중립국감시위원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스웨덴 왕실과의 인연 덕분에, 당시 감시위원단장이던 군나 스미드마르크 장군과 가까운 사이였다. 어리고 철없던 시절, 나는 이 사실을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에게 전했고, 그 선택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비밀리에 마련된 자리에서 장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푸에블로 호 승조원 석방은 미국 정부의 발표처럼 쉽지 않으며, 최소 1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 발언은 다음 날 신문 지면에 머리기사로 실렸고, 곧 외교 문제로 번졌다. 유엔군사령부의 항의가 이어졌고, 스웨덴 정부는 장군을 본국으로 소환했다. 당시 한국에는 스웨덴 대사관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사건의 배경에 나와 가족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나는 결국 꿈꾸던 스웨덴 유학을 포기해야 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푸에블로 호 승조원들은 1년 뒤 석방되었다. 그러나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푸에블로 호는 지금도 평양에 전시된 채 체제 선전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이 함정의 이름은 원주민 푸에블로 족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마을'과 '공동체'를 뜻하는 그 어원은 동일하다.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나는 지금도 스미드마르크 장군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산다. 역사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선택과 우연을 가차 없이 휩쓸고 지나간다. 푸에블로라는 이름이 내게 남긴 기억은, 그래서 더욱 무겁고도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