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보건의료 점검] ③ 'HIV 게임체인저' 왔지만…흔들리는 남아공 보건
현장선 의료진 부족·환자 대기 증가…'보건 주권' 시험대 오른 아프리카
![지난 5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세쿤다에서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HIV 예방주사제 레나카파비르 상자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21/yonhap/20260621080321996ftan.jpg)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나확진 기자 = 지난 5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음푸말랑가주 엠발렌흘레의 한 진료소에서는 앞으로 남아공 보건 역사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 여성이 주사를 맞았다.
21세의 제인 믄데벨레가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예방·치료의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는 주사제 '레나카파비르'(Lenacapavir)를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접종받은 것이다.
믄데벨레는 의사인 아론 모초알레디 남아공 보건장관으로부터 직접 주사를 맞은 뒤 "정말 기대됩니다"라는 짧은 소감을 말했다.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가 개발한 레나카파비르는 단 1회 접종으로 6개월간 HIV 감염을 막아주는 주사제다. 과학 저널 사이언스가 '2024년 올해의 혁신'으로 선정할 정도로 HIV 예방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같은 날 세쿤다의 운동장에서 레나카파비르 출시를 알리며 "오늘은 희망의 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현재 남아공 6개 주와 HIV 고위험 지역 24곳에 있는 공공보건시설 360곳이 레나카파비르를 제공할 준비를 마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아공 정부 재원과 국제 기금을 합해 13억 랜드(약 1천200억원)를 레나카파비르 보급에 투입함은 물론 내년 말까지 100만명, 3년 내 300만명까지 제공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5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쿤다에 설치된 이동식 진료소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21/yonhap/20260621080322214eakq.jpg)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야심 찬 계획에도 남아공 보건·의료계는 HIV 대응에 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미 국제개발처(USAID)를 실질적으로 해체하고 남아공을 포함한 아프리카 지역에 지원하던 보건 원조를 중단·삭감한 여파가 크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엔에이즈계획(UNAIDS)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남아공의 HIV 보균자는 78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2024년 한해 발생한 신규 감염자만 17만명이다.
미국의 지원이 계속되던 2024년에도 항바이러스제 치료를 받고 있던 HIV 보균자는 630만명에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국제 비정부기구인 '인권을 위한 의사들'(PHR)과 남아공 비영리단체가 올해 4월 공동 발간한 '버려진 투자, 커지는 위기' 보고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 중단은 단순히 예산 규모 이상의 피해를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역내 중심 국가인 남아공은 최근 몇 년간 HIV 대응 예산에서 미국 지원 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17%에 그쳐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는 양호한 상황이다. 하지만 해당 자금은 HIV 고위험 청소년 여성 지원뿐 아니라 소아 진단, 데이터 관리,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 등에 사용됐기에 새 환자 발견이나 확산 방지 등 지원 부문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인터뷰한 한 HIV 예방 활동가는 "예전에는 거리에서 바로 HIV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며 "지금은 무조건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긴급에이즈구호자금(PEPFAR) 중단으로 거리 검사나 이동 클리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환자들을 응대할 상담 서비스가 축소되고 의료진의 과부하로 환자 대기시간이 늘었으며 HIV 검사를 생략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지적했다. 진료소에서 하루 종일 기다려도 의사를 만날 수 없자 그냥 돌아가는 환자도 있었다고 전했다.
PEPFAR가 지원하던 데이터 입력 인력이 사라지면서 치료 이탈 환자 파악이나 신규감염 추적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규 감염이 증가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보고서는 우려했다.
지난해 발표된 남아공 시민단체 리트시제의 전국 325개 의료시설 조사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료 인력 부족과 환자들의 대기시간 증가가 문제로 지적됐다.
조사에 참여한 환자들의 약 35%는 "항바이러스제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이전보다 길어졌다"고 답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의사들이 시위하는 일도 벌어졌다.
남아공 매체 그라운드업에 따르면, 지난 17일 남동부 콰줄루나탈주 주도 피터마리츠버그에서는 의사 50여명이 주청사 앞에 모여 의사 실업 사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시위에 참여한 의사 캐서린 하디는 올해 1월부터 실업 상태라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남아공 정부는 지원 감소로 생긴 위기를 단순한 원조 공백이 아닌 자생력과 보건주권 구축 계기로 삼겠다며 자체 예산 확대와 의약품 역내 생산을 강조하고 있다.
![남아공 세쿤다의 이동진료소에서 레나카바비르를 들고 있는 간호사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21/yonhap/20260621080322418jlki.jpg)
라마포사 대통령은 앞선 세쿤다 연설에서 2040년까지 대륙 내 보건 제품의 60%를 자체 생산하겠다는 아프리카연합(AU)의 목표를 언급하며 "남아공이 강력하게 아프리카 제약·바이오 산업 육성을 계속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건 안보는 경제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며 "의약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며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주권이며 회복력이자 번영"이라고 강조했다.
남아공 재무부도 올해 예산을 발표하며 미국의 예산 지원 감소로 인한 HIV·에이즈 연구 공백 보전을 위해 4억1천만 랜드를 추가 투입하고, 내후년까지 전체 보건 예산 규모를 3천343억 랜드로 현재보다 4.2%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자생력 확보와 보건 주권 구축은 남아공뿐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의 과제로 대두했다.
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아프리카 CDC)의 장 카세야 사무총장은 최근 연합뉴스와서면 인터뷰에서 "아프리카는 더 이상 원조 의존 모델에 머물 수 없다"며 "지역 생산 능력과 자체 공급망, 국내 보건 재정 확대를 통해 보건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원조 축소 이후 아프리카 각국이 공동 조달 체계와 의약품 현지 생산 확대, 감염병 감시망 구축에 나서고 있다며 "보건 안보는 주권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ra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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