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라는 가치 속에서 경쟁하기 vs 경쟁이라는 가치 속에서 연대하기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2026. 6. 20. 15:3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레임과 이야기]

[미디어오늘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 2025년 10월3일 자유대학과 부정선거방지대 등 단체 회원들이 서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을 출발해 종로구 광화문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흔히 연대는 진보의 언어이고, 경쟁은 보수의 언어로 인식된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굉장히 단순하고 분명한데 현실을 살펴 보면 그렇기 간단하지만은 않다.

연대라는 가치가 주류인 커뮤니티 속에서도 경쟁은 존재한다. 그런 커뮤니티에서 얼마나 '연대적인가'를 두고 경쟁하는 일은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반면 경쟁이라는 가치 속에서도 연대는 꽃이 피기도 한다. 흔한 말로 동병상련이다. 경쟁 속에서 모두가 주체성을 잃고 타자화되는 모습을 보며 서로가 서로를 연민하게 되는 식이다.

이처럼 연대와 경쟁은, 즉 진보와 보수는 어느 하나를 완전히 배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늘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느 하나가 다른 것 하나에 뒤집혀 연결되어진 궤도의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느 공동체 혹은 사회 나아가 국가가 '진보적'이라는 가치 속에 있다고 해서 그 사회의 전체를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건 위험하다. 그 사회 속 사람들이 당연히 '진보적'일리는 더욱 더 만무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군사독재정권 아래 그 사회와 구성원들이 무조건 다 '보수적'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고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걸 경험하기도 했다.

하물며 사정이 이처럼 단순하지가 않은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진보적 교육'을 한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진보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요즘 20대 보수화 혹은 극우화라는 프레임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 때 기성세대가 우선 한탄부터 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우리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적어도 군사독재 시절보다는 '진보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전제하게 만든다.

다음으로는 학교 역시 국가의 민주화와 발맞추어 좀 더 진보적이 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강압적으로 외우던 과거와 달리 민주시민사회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우선 '민주화'가 '진보'인가를 되물을 필요가 있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절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민주화는 반독재, 반파시즘이고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가치 모두의 너머에 있는 것이다. 독재와 파시즘을 옹호하는 것을 보수라고 부를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된 우리 사회가 그 자체로 '진보적'일 것이라는 전제는 금방 허물어진다. 그러면 무엇으로 민주화 이후의 진보와 보수를 규정할 수 있을까? 거기엔 여러 가지 잣대가 있겠지만 앞서 말한 '연대'와 '경쟁'이라는 개념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잣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 잣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보다 오히려 더 '경쟁적'인 사회로 바뀌어 왔다. 여기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지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걸 분석하는 건 아니다. 이러한 '경쟁적 가치'가 그 어느 곳보다 더 교육 현장을 강타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녀 교육, 특히 대학 입시에 거의 목숨을 거는 분위기이고, 예나 지금이나 '경쟁'을 해서 입시를 통과하는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전혀 바뀌지가 않아서다.

물론 겉으로 보면 무시무시해 보이던 체벌이 사라지고, 한방의 인생 도박 같던 학력고사가 폐지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입시의 관점에서 보면 한 번 맞는 걸로 끝나던 체벌 대신 전과처럼 계속 남아서 수험생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벌점'과, 학창 시낼 내내 모든 순간이 평가의 대상이 되어버린 내신과 수시 위주의 입시는 보다 더 촘촘하고 어쩌면 악랄한 경쟁 환경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민주화 이전보다 더욱 '보수적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셈이다. 그 보수적 환경 속에서 진보적 교육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진보적 가치를 조롱하고 싶어 지지는 않을까?

▲ 서울 대치동 학원가. ⓒ연합뉴스

그뿐만이 아니다. 더 치열해진 경쟁을 통과하고 나서 얻는 과실은 과거보다 더 초라해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나마 좀 더 나은 과실을 얻는 아이는 부모의 재력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기도 했다. 수많은 입시 정보와 수시 지도 없이 혼자 공부해서 소위 서울대를 갈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젊은층이 보수화가 된 것이 아니라 젊은층을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도의적으로 그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기성세대 역시 더 보수화된 현실에서 무한 경쟁에 신음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최소한 젊은층에게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어진 것에 대해 정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는 기성세대라면, 그래서 당장에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믿는 기성세대라면 지금 당장 현실에서 가능한 선택이 무엇인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경쟁 자체를 획기적으로 약화시키든지 아니면 확실하게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하든지 둘 중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오랫동안 말만 해온 서울대 폐지 같은 방법론인데 사실상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방법론만 남는데 이는 어쩌면 진보 교육계에서조차 그토록 혐오하는 정시 부활인 것이니 역시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맞다. 우리는 이미 덫에 걸렸다. 고양이 목의 방울만 점점 더 커지고 있다.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