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도 베트남 5000명 왔다... K팝 콘서트 못잖은 e스포츠 열기
선수 나오자 “잘생겼다” 한국어 환호성
“내 얼굴 봐주면 한화생명 가입” 피켓도

18일(현지 시각) 오후 베트남 하노이 꾸언응어 체육관. 최고 기온 36도에 습도 60%의 찜통 날씨 속 한국 e스포츠 구단 한화생명e스포츠(HLE)가 연 팬 행사장 굿즈 부스 앞에 수백 미터 줄이 늘어섰다. HLE는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를 종목으로 하는 프로 게임단이다. 부채질과 선풍기로 더위를 달래면서도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VIP석(250만 동·약 14만7000원)은 2분 만에 팔렸고, 3600석 전석이 매진됐다. 티켓을 못 구한 팬들까지 합쳐 약 5000명이 체육관 안팎을 가득 채웠다.
◇한국어 피켓 즐비하고 함성까지 한국어
행사 시작 전부터 체육관 입구 곳곳에서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한글 문구를 또박또박 피켓에 옮겨 적는 팬들이 눈에 띄었다.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피켓을 높이 들고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한국어를 모르면서도 선수에게 닿을 말을 찾아 한 글자씩 눌러 쓰는 모습이었다.

본 행사가 시작되고 ‘제우스’ 최우제, ‘카나비’ 서진혁, ‘제카’ 김건우, ‘구마유시’ 이민형, ‘딜라이트’ 유환중이 무대에 오르자 함성이 터졌다. “잘생겼다” “훤칠해요”를 한국어로 외치는 팬들 사이로 선수 얼굴이 박힌 응원봉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한국어 피켓도 즐비했다. 그중 “내 얼굴 봐주면 한화생명 가입해줄게요”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현장은 K팝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 복장 팬들이 체육관을 메웠고, 입구엔 선수 얼굴 사진을 단 씩로(베트남 전통 세 바퀴 자전거)가 세워졌다. 인근 전광판과 현수막에도 선수 얼굴이 내걸렸다. 이를 본 선수들도 놀란 기색이었다. 카나비는 “베트남을 잘 몰랐는데 와보니 팬 열기가 뜨겁고 길거리에서도 많이 알아봐줘서 고마웠다”고 했다.
T1에서 HLE로 이적한 구마유시를 따라 응원팀을 바꾼 린 티 타오(22)씨는 “선수를 직접 볼 생각에 땡볕에 기다리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선수를 계기로 한국어를 배운 지 4년이 넘었다고 했다. 선수들을 보기 위해 미국 버지니아에서 날아온 베트남계 팬도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롤 팬층이 가장 두꺼운 나라다. 베트남 자체 프로 리그(VCS)는 롤드컵 독립 시드권을 가진 별도 리그로 운영되는데, 4대 주요 지역(한국·중국·북미·유럽)을 제외하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리그로 꼽힌다. 2024 LCK 스프링 결승전은 한국 리그임에도 베트남에서만 56만명이 동시 접속해 시청했다.
롤이 베트남에서 유독 뿌리를 내린 배경엔 PC방 문화가 있다. 롤은 저사양 PC에서도 잘 구동되는 게임이라 동남아 환경에서 빠르게 퍼졌고, 한국처럼 베트남에 촘촘히 깔린 PC방 문화도 한몫했다. 한국 선수들이 주도하는 LCK를 보고 자란 베트남 팬들에게 한국 구단은 일종의 프리미엄 브랜드라고 한다. K팝·K드라마에 이어 K e스포츠가 그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셈이다.

이날 행사는 HLE가 지난해까지 두 해 연속 호찌민에서 열었던 팬 행사를 하노이로 옮겨 처음 개최한 자리다. 첫해 1500석, 이듬해 2500석, 올해 3600석으로 규모가 해마다 커졌다. LCK 구단이 베트남에서 3년 연속 팬 행사를 연 것은 HLE가 처음이다.
◇아시안게임 앞둔 선수들 “반드시 금메달”
이날 무대는 선수들에게도 각별했다. 지난해 이 자리에서 MSI 진출 실패를 사과했던 선수들이 약속을 지키고 돌아온 자리였다. HLE는 올 LCK 정규 리그 1·2라운드 통합 1위를 차지해 오는 28일 대전에서 열리는 MSI(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에 창단 첫 출전한다. 제우스는 “작년엔 팬들에게 죄송했는데 올해는 기분 좋게 만날 수 있어 뜻깊다”고 했다. 구마유시는 “창단 첫 MSI인 만큼 우승까지 가는 과정에서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앞에 놓인 일정은 MSI만이 아니다. 롤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 정식 종목으로 첫선을 보인 뒤 한국이 대만을 꺾고 초대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제우스와 카나비도 금메달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올 9월 일본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도 롤이 정식 종목으로 열리는데, 이번 한국 대표팀엔 제우스·제카·구마유시 등 HLE 선수 세 명이 포함됐다. 제우스는 “아시안게임에서도 좋은 결과로 반드시 국위선양할 것”이라고 말했다.
HLE 관계자는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LCK 팬층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이라며 “3년 연속 팬 행사로 현지 팬들과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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