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대러 외교 접촉 놓고 균열…독·프 “월권”, 회원국 의견 분분

유럽연합(EU) 지도부가 러시아와 향후 평화협상을 염두에 두고 비공개 외교 접촉을 시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원국 간 갈등이 분출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강하게 반발한 반면, 일부 국가는 EU 차원의 소통 채널 구축 필요성을 강조하며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18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는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측의 대러 접촉 시도가 주요 논란으로 떠올랐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회원국들과 사전 협의 없이 러시아 측과 접촉을 시도한 데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독일 정부 관계자도 회의 후 코스타 의장 측의 행보를 회원국들과 조율되지 않은 비전문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며 “모욕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논란은 코스타 의장의 수석보좌관인 페드루 루르티가 최근 수주 동안 크렘린궁 관계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일부 회원국들은 협상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상태에서 비밀 외교를 시도한 데다 관련 내용을 사후에도 충분히 공유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코스타 의장 측은 러시아와의 소통 창구를 개설하기 위한 제한적 접촉이 있었을 뿐 실질적인 협상은 진행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또한 향후 평화협정 논의가 시작될 경우 EU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외교 채널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를 시작할 시점이 아니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특히 장차 러시아와 직접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EU 지도부가 아닌 독일·프랑스·영국으로 구성된 이른바 ‘E3’가 협상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원국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은 독일·프랑스 입장에 동조했다. 반면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은 러시아와의 대화 채널 확보 자체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텐 미할 에스토니아 총리는 “독재자들과 별도 협상 틀을 구축하려 했던 과거 사례들은 경고를 남겼다”며 EU가 중재자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어떤 시도라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논란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장기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유럽 내부에서 러시아와의 직접 대화 여부와 협상 주체를 둘러싼 시각차가 여전히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스타 의장은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행보를 적극 옹호했다. 그는 러시아가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신호는 없지만, 유럽이 러시아의 입장을 제3국을 통해서만 파악해서는 안 되며 유럽의 메시지 역시 직접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유럽 내 다양한 외교 채널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러시아가 협상 테이블에 나설 경우 유럽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회원국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한편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오랜 기간 EU 정책에 제동을 걸어왔던 오르반 빅토르 전 헝가리 총리의 퇴장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지지 공동성명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EU는 대러 경제제재 연장 기간도 기존 6개월이 아닌 12개월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문제와 함께 2028~2034년 장기 예산안도 논의했지만 이 역시 회원국 간 견해차가 뚜렷했다. 독일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재정 기여도가 높은 국가들은 예산 축소를 요구한 반면, 동유럽과 남유럽 국가들은 재정 지원 확대를 위해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규화 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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