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테오티우아칸 문명 저물자…마야도 함께 쇠락

2026. 6. 2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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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재의 기후가 바꾼 역사
‘달의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찍은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전경. 앞쪽으로 ‘죽은 자들의 거리’가 반듯이 놓여 있다. 저 멀리 왼편에 ‘태양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문명은 거대한 도시 규모와 정교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이 왕조의 피라미드 유적은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태양의 피라미드’는 그 웅장한 규모로, ‘죽은 자들의 거리’ 끝에 놓여 있는 ‘달의 피라미드’는 이곳에서 인신 공양이 자행됐다는 이유로 관광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현재 2026년 월드컵 축구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멕시코. 멕시코라는 국명은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패망한 아즈텍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인 ‘메시카(Mexica)’에서 유래했다. 이 아즈텍인들에게 테오티우아칸은 특별한 성지이자 전설의 도시였다.

16세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아즈텍 사회를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편찬한 『플로렌스 코덱스』라는 문헌이 있다. 이 책에서 테오티우아칸에 대한 아즈텍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아즈텍인들은 테오티우아칸이라 불렸던 이곳에서 신들이 창조됐다고 믿는다… 그리고 오직 어둠 밖에 없을 때 모든 신들이 이곳에 모여 태양을 창조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즈텍인들에게 테오티우아칸은 과거에 덧없이 사라진 도시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세계 질서를 처음으로 구축한 ‘최초’의 문명이었다.

교역 대상국 와해되면 함께 문명 흔들려
테오티우아칸은 전성기의 인구가 12만 명을 넘을 정도로 아즈텍 왕조 이전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도시 문명이었다. 그런데 이 거대했던 도시가 기원후 7세기에 갑작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원인을 두고 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논쟁을 거듭했다. 주로 전쟁이나 내란이 멸망 이유로 제시돼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근본적인 이유가 가뭄에 있다는 주장이 자주 들린다. 대가뭄이 전쟁 혹은 내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대가뭄은 이웃인 마야를 멸망시킨 요인으로 여겨졌을 뿐 테오티우아칸의 쇠락과는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테오티우아칸 또한 가뭄 때문에 붕괴했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고지대는 반건조 지역으로 생태적으로 불안정한 곳이다. 마야가 위치한 유카탄 지역과 비교할 때 강수량이 훨씬 적다.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다수의 사람이 함께 거주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3세기 중반 이후 도시 규모가 확대되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지역 환경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세기부터는 기후마저 건조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6세기 기후변화의 시발점은 대형 화산 폭발이었다. 이는 필자가 이전 글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기원후 535~536년에 발발한 아이슬란드(혹은 알래스카)의 화산 폭발이 대서양 반대편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죽어갔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어린아이의 뼈 상태는 당시 참혹했던 기근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기근은 곧 전쟁과 내란으로 이어졌고 주변의 다른 도시들(촐룰라·소치칼코·카카슈틀라 등)은 테오티우아칸의 어려운 정세를 틈타 지역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갔다. 주변 도시의 발호로 정치적인 힘마저 상실한 테오티우아칸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테오티우아칸의 쇠퇴가 7세기에 발발한 전쟁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측했고, 지금은 전쟁보다 내란에 초점을 맞추는 학자들이 좀 더 많다. 파괴의 흔적이 지배층의 거주지나 그들을 상징하는 구조물에 국한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든 민란이든 혼란의 시작은 기근을 일으킨 가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편, 멕시코 고원 동쪽으로 바다 너머에 위치한 유카탄 반도에는 수십 개의 작은 도시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들 도시는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이합집산을 반복했으며 건축술·달력·문자·종교·공놀이 의식 등을 공유했다. 이른바 ‘마야 문명’으로, 독립 도시국가들의 네트워크에 가까웠다.

마야 도시들은 4세기로 접어들면서 강력한 전력을 갖춘 테오티우아칸의 간접적인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테오티우아칸의 왕은 마야에 군을 진격시켜 도시들을 차례차례 정복했고 자신의 친척들을 도시의 수장으로 삼았다. 특히 마야 문명을 대표하던 도시 티칼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에 앉혔다.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 중부의 중앙집권국가였던 반면 마야는 작은 도시들로 나뉘어 그들끼리 불화가 심했으므로 마야가 테오티우아칸에 맞서 싸우기는 쉽지 않았다. 마야는 이후 150년 넘게 테오티우아칸의 간섭을 받았다.

열대우림 위로 일부가 드러난 마야 도시 ‘칼라크물’의 피라미드. [사진 위키피디아]
그런데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위명(威名)을 떨치던 테오티우아칸이 6세기부터 진행된 건조화로 기세가 꺾이자 마야의 도시들은 다시금 패권 경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7세기 초 마야의 가장 강력한 세력은 칼라크물과 티칼이었는데, 8세기 중엽까지 전장에서 세 차례 맞붙은 끝에 결국 티칼이 승리했다. 장기간의 전쟁 탓에 승리한 쪽이나 패배한 쪽이나 모두 상처만 떠안았고, 뒤이어 나타난 대가뭄에 도시들은 하나둘씩 폐허가 되어 갔다. 이곳의 마야인은 정든 고향을 벗어나 세노테(용천)에서 물을 상시 얻을 수 있는 북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촌락을 이루며 살았다. 마야인이 떠난 뒤 남부에 덩그러니 남은 가지각색의 피라미드는 이후 미국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수백 년간 숲에 덮여 있었다.

“마야 몰락 원인, 가뭄만으로 설명 못해”
마야 문명은 9세기부터 더욱 심하게 위축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단, 자연과학적 분석 결과는 인구 증가와 환경 훼손의 여파로 7세기와 8세기에 도시 간 전쟁이 빈번해졌고 이후 9세기부터 나타난 가뭄이 마야 문명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여전히 이때의 대가뭄을 설명할 만한 기후변화 메커니즘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마야 몰락의 가뭄 가설을 100% 신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적절한 인과 관계가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다수의 기후변화 요인이 상호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실제 가뭄다운 가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최근 들어 가뭄 가설의 모호함이 연이어 부각되고 마야 멸망에 있어 전쟁과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을 강조하는 기류가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당시 유카탄 지역에 가뭄이 도래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기후변화는 아니었고 그 역할이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만약 마야 멸망에 있어 대가뭄이 일차적 원인이 아니었다면 테오티우아칸과의 교역이 끊긴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마야의 운명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테오티우아칸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차지하던 사회·경제적 비중은 무척 컸다. 이 문명의 쇠락이 초래한 여파가 멕시코의 중부 고지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방위로 퍼져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테오티우아칸의 부지런한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남동쪽의 유카탄 반도로 진출하여 그곳 마야 도시들과의 교역을 주도했다. 중요한 거점에는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수 있는 기관까지 설치했고, 마야의 도시들은 테오티우아칸 상인의 핵심 교역지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두 지역 간 무역량이 늘어나면서 마야인들에게도 테오티우아칸과의 교역은 점점 생존과 직결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런 테오티우아칸이 600~700년경에 급작스럽게 흔들리자 마야 또한 혼란을 피하기 힘들었다.

테오티우아칸 신전 외벽에 장식된 케찰코아틀(깃털뱀) 부조. 케찰코아틀 숭배 신앙은 테오티우아칸 문명에서 발전해 마야로 확산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어떤 나라의 멸망이 주변 강국의 붕괴에서 비롯된 사례는 과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200~3900년 전 유라시아 전역에 대규모 가뭄이 도래했을 때에도 화려한 도시 시설을 자랑하던 인더스계곡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무너졌는데, 가뭄 자체도 문제였지만 가뭄으로 먼저 쇠퇴한 이웃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빈자리가 컸다. 주된 교역 대상국이 갑자기 와해되는 바람에 인더스계곡 문명 또한 가뭄에 더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마야 문명과 하라파 문명은 당대에 꽤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했지만, 주변의 대문명(테오티우아칸, 메소포타미아)과의 교역이 어려워지자 그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만약 미래의 기후변화로 생태계에 이상이 생기거나 난민 문제가 확대돼 미국이나 중국 같은 대국이 심대한 타격이라도 입는다면, 지구상의 나라들 대부분이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소국들이 위기에 빠지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현시대의 환경위기는 그래서 난해하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UC 버클리에서 생물지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 『한국인의 기원』 『기후의 힘』 『인간의 시대에 오신 것을 애도합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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