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승리 이끈 일본 정보력…80년 잠든 DNA 깨어나나
[제3전선, 정보전쟁] 일본 정보의 저력과 부활(상)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의 후방을 교란하는 첩보전을 이끌어 일본 승리에 기여한 아카시 모토지로. 육군 대장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헌병사령관과 대만 총독을 지냈다. [사진 위키피디아]](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20/joongangsunday/20260620000311823rkvj.jpg)
그런데 일본 정보의 저력을 기억하고 있는 국제정보계는 이를 단순한 정보조직 개편 정도로는 보지 않는다. 막강했던 일본 정보의 귀환이 될 수 있다는 시선이 많다. 과거 일본이 한반도·중국·러시아, 그리고 미국·동남아 등 대륙과 태평양으로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할 때 정보가 어떻게 뒷받침했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미카제식 아닌 살아남아 임무 완수 방점
더욱이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뿌리째 흔들렸던 일본 정보가 전후(戰後) 어떻게 끈질기게 살아남았는지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 정보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최근 일본의 정보개혁 추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렴풋이 보인다.
일본 정보의 기억 앞자리에는 늘 일본 정보의 상징과도 같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가 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독일 유학과 프랑스·러시아 무관을 역임해 유럽 정세에 정통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즉각 그를 유럽으로 밀파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내부를 흔들어 후방에 제2의 전선을 만들라는 특명을 내렸다. 러시아 내부를 흔들어 전쟁을 조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다.
이에 아카시는 중립국 스웨덴으로 날아가 본격적인 정보전에 돌입했다. 황제의 무능, 누적된 노동자·농민 불만, 지식층에 스며든 허무주의, 소수민족의 분리·자치 요구 등 러시아의 내부 분열을 예리하게 읽고 있었던 아카시는 이 분열의 인화물에 성냥불을 던지는 정보전을 전개했다.
먼저 러시아의 모든 반정부 세력을 한 테이블로 모았다. 각지에서 따로따로 타오르던 불만의 불씨를 한군데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다. 1904년 파리 비밀회의와 1905년 제네바 비밀회의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혁명세력과 핀란드·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모아 반(反) 러시아 연합전선을 만들고, 차르 체제를 타도한다는 공동합의도 이끌어 냈다. 지식인과 연계해 노동자·농민 시위도 배후 지원했다.
누적된 내부 불만을 이용한 이런 정보전은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했다. 폭동과 봉기, 민족 분쟁을 진압하기 위해 상당수 러시아 병력이 전방 대신 본토에 발이 묶였다. 철도와 공장 파업으로 병참과 군수 생산도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특히 내부 분열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국력 결집 기반을 붕괴시켰다.
이처럼 아카시는 내부혼란 정보전을 통해 러시아가 전쟁에 집중하지 못 하게 함으로써 러일 전쟁 승리를 보이지 않게 뒷받침했다. 이후 아카시 정보전은 제국 일본의 침략 정보전 원형이 됐다. 아카시 자신도 러시아 정보전 성공 교훈과 노하우, 보완할 점을 종합해 복명(復命)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복명서 제목은 ‘낙화유수(落花流水)’라는 서정적 표현으로 위장했다.
![‘낙화유수(落花流水)’란 제목의 아카시의 대러시아 정보전 보고서. [사진 위키피디아]](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20/joongangsunday/20260620000313102uhff.jpg)
이 단순한 메시지는 위력을 발휘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던 토착민들에게 일본은 외세가 아니라 오히려 서구 지배를 몰아낼 수 있는 지원세력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아웅산처럼 버마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과 함께 영국에 맞서 싸우자며 조직적으로 반영(反英) 활동을 전개해 일본군의 진격로를 만들어 주었다. 인도·말레이에서도 인도 병사들이 “일본과 함께 인도 독립을 위해 싸우자”며 반영 대열에 앞장서는 등 영국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었다.
이처럼 일본 정보는 민심과 여론, 민족 정체성을 활용하는 정치 정보전에 능했다. 특히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우상 선전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일본의 군사행동을 아시아해방전쟁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승리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 정보사에서 제국 일본 정보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다.
일본 정보는 민간 연구조직을 국가전략 두뇌로 활용하는데도 탁월했다. 그 상징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사부다, 이른바 ‘만철 조사부’로 형식상으로는 철도회사 산하 연구부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철도 수송뿐만 아니라 자원 분포, 산업 동향, 민족 구성, 지방 권력, 사회 관습, 민심과 여론까지 조사하는 등 중국 대륙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를 통해 제국 일본이 ‘중국 대륙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를 설계하는데 적극 뒷받침했다. 싱크탱크와 정보분석기관, 지역연구소 기능을 한 조직 안에 결합한 형태로 현대 정보사의 선구적 사례로 꼽힌다.
제국 일본의 스파이 학교인 육군 나카노학교(陸軍中野学校)도 일본 정보의 상징과 같다. 주로 언어와 문화, 변장과 현지 적응, 민심 장악 교육 등을 통해 어떤 친화적 정보전을 사용해야 ‘일본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으로 인식되는지 연구하고 가르쳤다. 일본군이 동남아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도 나카노 출신 정보요원들이 구축해 놓은 이 같은 민심 확보 정보전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정보계의 중평이다.
특히 나카노학교는 일본군과 반대되는 정보 철학을 가르쳤다.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미카제식 정신주의가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최고의 충성이라고 가르쳤다. 무모한 영웅주의보다 냉정한 현실주의 정보철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제국 일본이 대륙과 해양으로 세력을 팽창할 때 정보는 이를 뒷받침하면서 일본 정보의 DNA를 만들었다. 단순한 정보수집을 넘어 상대의 내부를 정확히 읽고 흔드는 정보전에 능했다.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정치 정보전, 영향력 정보전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1963년 생산되고 1994년 비밀해제된 미 CIA의 ‘새 시대 일본 정보(Intelligence in the New Japan)’ 내부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과거 일본이 중국·러시아 등 강대국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정보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제국 일본 정보는 치명적 결함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보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점이었다. 당시 군부 권력이 워낙 강해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 정보보고를 하지 못했다. 가령 미국과 태평양전쟁 시 패전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미국인은 사치에 물들어 전쟁 의지가 약하다’라거나 ‘독일이 유럽을 제패하면 일본도 미국에 승리할 것’이라는 군부의 근거 없는 확증 편향에 밀려 자주 경시됐다. 이런 문화 때문에 이후 군부가 방향을 정해 놓으면 그 결론을 정당화하는 구조에 갇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정보가 됐다.

정보 칸막이 문제도 심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예컨대 전쟁을 주도한 육군과 해군의 알력이 심해, 마치 다른 나라처럼 정보 공유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작전 중시의 군 문화도 정보 왜곡을 낳았다. 가령 가미카제 특공대의 전과와 효과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정보보고는 “현장도 안 본 놈들이 전과를 폄하한다”고 매도되기 일쑤였다.
일본 정보사 연구의 권위자인 방위연구소 고타니켄(小谷賢)은 이를 예리하게 성찰했다. 2008년 ‘일본군과 인텔리전스-성공과 실패 사례(日本軍のインテリジェンス-成功と失敗の事例から)’ 논문을 통해 과거 일본의 정보 실패 원인으로 객관적 사실보다 직관에 의존한 정보 오판, 심각한 정보 칸막이, 거시 전략정보 소홀 등을 들었다.
이 같은 정보 실패는 결과적으로 2차 대전 패전으로 이어졌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승리한 연합국은 일본 정보가 다시는 전쟁 도발을 뒷받침하지 못하도록 군대 해체와 함께 정보조직도 거의 와해시켰다. 그 후 일본 정보는 지금까지 80년간 숨죽이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이 눈물겹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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