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라 투자·제2 반도체 발굴…초과세수로 'AI 세상' 대비해야"

40조원+α. 반도체 호황으로 올해 더 걷힐 것으로 예상되는 세수 규모다. 일각에선 내년도 세수가 50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향후 최소 2~3년간은 막대한 초과 세수가 유입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이 지배적이다. 인공지능(AI)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올라탄 한국 반도체산업이 이끌어낸 잭팟이다.
뜻밖에 찾아온 경제 성장은 또 다른 과제를 던졌다. 저성장 늪에 빠져 있던 한국 경제에 찾아온 막대한 초과 세수를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떻게 써야 할지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 최대 담론으로 떠올랐다. 한국경제신문은 거시경제와 재정 정책을 심도 있게 연구해온 젊은 경제학자 여덟 명에게 ‘초과 세수 활용법’과 관련해 일곱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고령화의 짐을 짊어져야 할 미래 세대의 부담을 경감하고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인적·인프라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 AI發 호황, 지속적 이익 가져올까
인터뷰에 응한 경제학자 대부분은 “아니다”고 답했다. AI 기술 발전이 19세기 산업혁명에 비견될 구조적 전환인 점은 분명하지만 장기적 초과 이익과 세수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재원 서울대 교수는 “정보기술(IT) 혁명 이후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지만 닷컴버블 과열과 붕괴, 회복이라는 순환도 반복됐다”며 “AI 혁명 또한 비슷한 경로를 따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는 “AI 호황이 지속될지는 미국 소수 빅테크의 설비 투자에 달린 만큼 빅테크의 수익화가 지연된다면 단기 조정은 불가피하다”며 “AI 투자 사이클과 자산 가격 변동에 따른 시장 과열 및 냉각이 반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기업이 미래에도 AI산업 선두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왔다. 최상엽 연세대 교수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 추격과 기술 세대 교체, 표준 기술 변화 등으로 반도체산업 초과 수익이 축소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론도 있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는 “IT 버블이 꺼졌지만 인터넷산업은 살아남아 범용 기술이 됐다”며 “AI 역시 철도, 인터넷처럼 장기간 활용될 기술인 만큼 AI발 호황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2) 초과세수 어떻게 써야 할까
현재 호황이 한국 경제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릴 기회라는 점에는 경제학자 대부분이 공감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최우선 투자처로는 ‘인프라와 인적 자본’을 꼽았다. 최상엽 교수는 “AI산업 확산에 대비해 전력망, 송전망, 용수, 데이터센터 등 민간이 단독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병목 구간 해소에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도입이 촉발할 수 있는 ‘K자형 양극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이윤수 서울대 교수는 “‘AI 로또’로 혜택을 보는 기업이 있는 반면 일자리를 잃고 불확실성에 노출되는 미래 세대가 생긴다”며 “초과 세수는 K자 양극화 하단에 있는 사람의 생산 능력을 높여주고 재교육을 지원하는 데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상민 경희대 교수도 “경력직 선호 현상이 짙어져 청년층이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지고 있다”며 “경력 형성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석진 교수는 “AI발 산업 구조조정에 대비해 상당한 재원을 사회 안전망 구축에 써야 한다”고 했다.
기술 혁신을 위한 마중물로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곽준희 서강대 교수는 “고등 교육 및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확충해야 할 시점”이라며 “AI 생태계 조성도 중요하지만 국가 산업 포트폴리오 다각화 측면에서 차세대 먹거리가 될 바이오, 첨단 로봇 등 신사업 육성에도 균형 있게 재원을 배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혜미 한양대 교수 역시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반대로 업황이 꺾일 때 받을 충격도 커졌다”며 “방위산업, 원자력, 바이오 등 잠재력 있는 차세대 성장 동력 산업에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3) 빚 갚는 데 우선 써야 하나
반도체 초과 세수 활용 논쟁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다. 다수 경제학자는 초과 세수 상당액을 재정 건전성 제고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준희 교수는 “한국 국가채무(D1·약 1268조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48%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보다 낮지만 공공기관 부채(D3)나 위기 발생 시 정부가 짊어져야 하는 민간 부채까지 고려하면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고 우려했다.
한국 인구구조 변화가 몰고 올 거대한 재정 부담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최상엽 교수는 “고령 인구가 급증해 국민연금, 건강보험, 기초연금, 복지 등 의무 지출 증가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는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해 세금을 부담해야 할 사람이 줄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정정책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사용하는 보험과 같은 수단인 만큼 초과 세수는 재정 건전화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진욱 숙명여대 교수는 “세금이 안 걷힐 땐 빚을 내서 쓰고, 많이 걷힐 때도 세금을 모두 써버리면 재정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며 “미래 세대를 돕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빚을 적게 물려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혜미 교수도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인구구조상 복지 재정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명약관화한 만큼 재정 여력을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장 잠재력 확충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우석진 교수는 “올해 명목 GDP 증가율이 10%를 웃돌 것으로 관측돼 국가채무 비율도 하락할 것”이라며 “당장 상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빚을 미리 갚자는 건 과도한 우려”라고 말했다.
(4) 이번 호황을 구조개혁 기회로
현재 호황은 묵은 환부를 도려낼 최적의 수술대라는 의견도 나왔다. 성장의 과실이 커질 것이란 기대가 있을 때 경제주체들의 타협을 이끌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최재원 교수는 “기업 성과를 노동자와 공유해야 한다면 그와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는 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윤수 교수는 “미래 산업이 요구하는 혁신 인재를 적시에 길러낼 수 있도록 교육개혁이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상민 교수는 “연금에서 발생한 채무를 재정 지원으로 해소하는 등 연금개혁 논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5) 재정 시스템은 효율적인가
학자들은 현행 재정 시스템이 세수를 기계적으로 배분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 사례로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를 꼽았다. 현재 내국세의 20.79%가 자동으로 교육교부금에 배분된다.
유혜미 교수는 “학생이 급감하는데 초·중등 교육에만 세수가 자동 할당되는 구조는 비효율적”이라며 “혁신 창출과 미래 투자가 시급한 고등 교육(대학)과 기초 R&D로 재원의 물꼬를 터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윤수 교수 역시 “미래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고등 교육에 돈을 쓰는 게 맞다”고 말했다.
(6) 기본소득 논의는 필요한가
초과 세수를 바탕으로 한 국민 배당금과 기본소득 제도 도입에는 경제학자 대부분이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유혜미 교수는 “AI가 일자리를 싹쓸이해 대규모 소득 공백이 발생한 상황이 아니다”며 시급한 주제가 아니라고 했다. 이어 “기본소득이 자활 능력과 삶의 질 개선에 어떤 효과를 내는지 충분한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윤수 교수 또한 “정부가 현금을 나눠 주는 대신 스스로 소득을 창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우리나라처럼 전 국민 소득 데이터를 갖춘 나라가 고소득자에게까지 획일적으로 현금을 나눠 주는 건 재원 낭비”라고 말했다.
연금 제도를 선진화하는 게 더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제언도 나왔다. 곽준희 교수는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으로 이어지는 다층적 연금제도를 선진화해 기업의 성장이 국민 노후 자산 증식으로 직결되게 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석진 교수는 “초과 세수로 국민 배당을 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국부펀드에 넣어 미래를 위해 쓰자는 주장 등이 있는데, 중간 어딘가가 답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7) 과거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은
최상엽 교수는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IT 등 과거 호황 가운데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짚었다. 이어 “경기가 좋을 때 세수가 남는다고 지출을 덩달아 늘리는 경기 순응적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혜미 교수는 “과거처럼 특정 산업에만 정부가 돈을 쏟아부어 키우는 방식은 기술 변화가 빠른 지금 환경에서 통하지 않을 수 있다”며 “끊임없는 R&D 투자와 인적 자원 개발, 경쟁력 없는 산업의 구조조정으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성미/김일규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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