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發 '슈퍼모멘텀'…이번에는 진짜 다를까

정영효 2026. 6. 1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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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생산성 혁명
대한민국, 반도체·로봇·제조 등
대체 불가능한 '초크포인트'로
영원한 호황 없다
구조적 전환 맞지만 언젠가는 꺾여
AI 특수로 번 돈 미래 위해 투자해야

확실히 과거와는 다르다. 반도체 슈퍼호황이 한국 경제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1년 전 3000에 불과하던 코스피지수는 19일 9052.42를 기록했다. 기업 실적과 수출액, 성장률 등 거시 지표도 뚜렷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속도와 기울기다. 반도체 효과다. 


반도체 호황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양상이 달랐다. 정보기술(IT) 혁명 당시 세계 반도체 매출은 2003년 1분기를 시작으로 15분기 동안 약 80% 늘어난 뒤 증가세가 꺾였다. 스마트폰이 대중화한 2013년 사이클에서도 반도체 매출은 15분기 동안 30%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인공지능(AI) 대전환의 막이 오른 2023년 1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13분기 동안 글로벌 반도체 매출은 250% 이상 급증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부터 2028년까지 3년간 벌어들일 이익만 2500조원이 넘을 전망이다. 현재의 호황이 일시적인 경기 순환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전환일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인류는 AI 대전환이라는 문명사적 사건의 초입에 서 있다. 지금은 데이터센터를 깔고 대규모언어모델(LLM)을 학습시키는 인프라 확충의 시기다. 앞으로 AI 에이전트를 활용하고 피지컬 AI가 본격화하면 한국 반도체, 전력기기, 정밀기계, 로봇 기술, 제조 데이터 등은 대체 불가능한 ‘초크포인트’가 될 수 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4월 SNS에 “오랫동안 순환형 수출경제이던 한국 경제가 AI 시대에 지속적으로 초과 이윤을 생산하는 기술독점적 구조로 전환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쓴 이유다.

하지만 역사는 “영원한 호황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자동차, 라디오 보급과 대량 생산으로 유례없는 풍요를 누린 1920년대에도, 인터넷이 생산성을 폭발시킨 1990년대 말에도 사람들은 ‘과거의 잣대로 새 시대를 재단하면 안 된다’고 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번에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는 기대는 언제나 빗나갔다.

경제학자들은 그래서 ‘경기는 언젠가 꺾인다’고 가정하고 국가 전략을 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뜻밖에 찾아온 막대한 초과 이익과 이에 따른 초과 세수를 AI 시대에 맞는 산업 구조로 전환하는 데 과감하게 투자하고, AI에 일자리를 빼앗길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출생·고령화로 성장 잠재력을 잃어가던 한국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한국 사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생산성 혁명 이제 시작…장기호황 누리게 될 것"
메모리 공급망 쥔 韓 최대 수혜국…"산업구조 개편 성공땐 호황 지속"

‘닷컴 버블’의 막이 오른 1995년 우리나라 반도체(전자집적회로) 수출은 168억달러로 1년 만에 68.4% 늘었다. 반도체 수출을 시작한 1977년 이후 경험한 적 없는 증가율에 우리 경제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버블이 끝난 2001년 반도체 수출은 112억달러로 주저앉았다. 이후 반도체는 3~4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했다.

인공지능(AI) 대전환의 시대를 맞은 올해는 숫자의 스케일이 과거와 다르다. 지난 1~4월 반도체 수출은 860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5% 증가했다.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수출은 695억달러로 217% 늘었다. 낸드플래시 353%(71억달러), D램 273%(288억달러), 고대역폭메모리(HBM) 157%(284억달러) 등 세부 품목의 증가율은 통상적인 업황 회복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호황은 반도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AI 데이터센터를 구성하는 컴퓨터, 차세대 고성능 저장장치인 SSD, 인프라 통신장비, 전력기기까지 관련 산업 전반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수출 기록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경제가 구조적 전환에 들어섰다는 기대가 커지는 배경이다.

처음에는 구조적 전환처럼 보였지만 경기 순환으로 끝난 사례도 많다. 2000년 닷컴 버블, 2021년 메타버스 붐이 그랬다. 그럼에도 AI 대전환을 증기기관 발명이나 인터넷 확산에 비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구축에 들어가는 투자 규모가 중장기에 걸쳐 천문학적으로 커지고 있고, 이 투자가 단순히 설비 증설에 그치지 않고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 한 반도체 대기업 사장은 “AI 경쟁의 중심이 이미 대규모언어모델(LLM)에서 에이전트 AI로 넘어갔고, 피지컬 AI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며 “일부 LLM 기업이 경쟁에서 이탈하더라도 ‘AI 거품 붕괴’를 우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반도체 등 관련 산업 수요는 장기간에 걸쳐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만의 낙관론이 아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과 자산운용사도 AI를 세계 산업 지형을 장기적으로 바꿔 놓을 힘으로 보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4년 다섯 가지 구조적인 변화를 ‘메가포스’로 명명하고 AI를 포함시켰는데, 올해 보고서에선 그중 AI가 가장 지배적인 힘이라고 평가했다. 빅테크의 전례 없는 설비 투자가 금리와 물가, 전력 수급, 산업 생산 등 거시 경제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블랙록은 이를 ‘마이크로(미시)의 매크로(거시)화’라고 표현했다.

블랙록에 따르면 2023년 2000억달러를 밑돈 빅테크의 투자 규모가 2030년에는 7000억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누적 투자액은 3조달러로 예측됐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맞먹는 규모다. JP모간도 ‘2026년 전망: 약속과 압력’ 보고서에서 “과거 주요 기술 혁신기의 투자 규모는 세계 GDP의 2~5%였지만 현재 AI 관련 투자는 1% 수준”이라며 “역사적인 선례에 비춰볼 때 AI 투자 붐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커질 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투자 경쟁을 벌이는 빅테크 중 누가 승자가 되든 상관없이 상당 기간 수혜를 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갖췄다는 평가가 많다. 메모리 부족 현상이 2030년까지 지속될 것이란 최태원 SK 회장의 전망도 같은 맥락이다.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현 산업통상부) 장관은 “AI를 계기로 산업뿐 아니라 경제 사회 질서 전반이 바뀌고 있는 지금은 순환적 변동이라기보다 구조적 전환이라고 봐야 한다”며 “이 기회에 AI 기반 산업을 더욱 키우고 경쟁력이 없는 업종은 구조조정하는 산업구조 개편에 성공한다면 상당히 오랜 기간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원천기술 약한 한국…AI 테마국 효과일뿐"
韓, 저평가된 원화·반도체 앞세운 '대만형 성장 모델'에 가까워

인공지능(AI)발(發) 반도체 슈퍼호황을 구조적 전환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물론 존재한다. 상승기의 진폭이 유례없이 크긴 하지만 이 또한 예외 없이 반복되는 경기 순환의 일부라는 것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뱅가드는 “2026년은 AI가 업무 전반에 본격적으로 내재화되는 원년이 될 것”이라면서도 “이미 이익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고, 신규 시장 진입자에 의한 ‘창조적 파괴’가 업종 전체의 수익성을 약화시킬 위험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는 AI의 영향력이 과장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2024년 발표한 ‘AI의 단순 거시경제학’ 논문에서 “10년 안에 AI로부터 의미 있는 영향을 받을 업무는 19.9%고, 이 가운데 수익성을 낼 수 있는 업무 비중은 23%여서 실제로 AI의 영향을 받을 업무는 전체의 4.6%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 관련 산업의 초호황도 ‘AI 테마국가 효과’일 뿐으로 보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AI 전환의 병목인 반도체와 저장장치, 통신장비, 전력기기 등 관련 산업을 보유한 한국이 일시적인 초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다. 테마 열풍이 뜨거울수록 대체 기술 개발 수요가 커지고, 그만큼 경기 하강의 골도 깊을 수밖에 없다.

산업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1달러를 밑돌던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30~40달러까지 치솟았으니 어디선가는 반도체 없이 AI를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을 것”이라며 “반도체 수요나 기술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것이 가장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AI 대전환의 발화점인 원천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양강 체제가 굳어져 가는 것은 한국의 최대 약점으로 지적된다. 한국형 대규모언어모델(LLM)인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나 LG 엑사원의 안착 없이 AI 대전환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긴 어렵다는 자성이다. 산업부 출신 전문가는 “최고의 기술력과 가치창출력을 기반으로 구조적 전환에 성공했다기보다 저평가된 환율과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대만 모델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피지컬 AI로 전환하는 과정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정우 베어로보틱스 최고경영자(CEO)는 “본격적인 피지컬 AI 시대로 넘어가기에는 데이터, 하드웨어 등 인프라가 여전히 부족하고 가격도 너무 비싸다”며 “가정용 홈로봇 시대가 열리기까지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구조적 전환이든 경기 순환의 일부든 한국이 AI 특수를 누리기 최적의 국가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제조업 생태계를 완벽하게 갖춘 한국은 전 세계 공급망 분절이 발생한 틈에 AI 시대가 요구하는 완제품을 가장 빠르게 생산·제공할 수 있다”며 “그 덕분에 시장 변화에 제일 먼저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AI 특수를 한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로 삼으려면 원천 기술력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전 원장은 “AI 관련 완제품을 모두 생산하는 수평적 제조업 포트폴리오는 미국 독일 일본보다 뛰어나지만 완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과 소부장 경쟁력을 포함하는 수직적 제조업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정부 산업 정책의 패러다임 역시 공급을 창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수요를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정부가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에 퓨리오사AI, 리벨리온 같은 토종 기업의 신경망처리장치(NPU)를 일정 비율 이상 쓰도록 하는 식으로 성장 환경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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