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넘긴 부모 둔 자녀, 병이 13년 늦게 왔다…'덜 예민한' 유전자가 비결

"우리 친정 엄마는 아흔 넘어서도 병원 갈 일이 없으셨는데, 시댁 어른들은 환갑 지나면서부터 한 분씩 편찮으셨어요."
명절마다 양가 부모님 건강을 비교하게 된다는 어느 며느리의 말이다.
장수 유전자가 정말 있는 것일까. 단순한 우연인지, 유전의 영향이 진짜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 라이덴대 메디컬센터 연구팀이 그 답에 가까운 단서를 찾았다. 연구팀은 30년 가까이 장수 가족만 추적해온 연구 집단의 데이터를 분석, 부모의 장수 체질이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데 관여했을 법한 유전자 하나를 짚어냈다. 이 결과는 6월 16일 유럽인간유전학회(ESHG) 학술대회에서 발표됐다. 아직 다른 전문가들의 검증(동료 평가)을 거치지 않은 '프리프린트', 즉 잠정 결과 단계다.
흥미로운 내용은 이 유전자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유전자가 아니라 '적당히 힘이 빠진' 유전자였다는 사실이다.
오래 사는 집안엔 뭔가 공통점이 있다
이번 연구의 기반이 된 '라이덴 장수 연구(Leiden Longevity Study)'는 2002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장기 추적 프로젝트다. 90세 이상 장수한 형제자매가 한 집안에 최소 두 명 이상 있는 '장수 가문'을 찾아, 그 부모와 자녀, 손주까지 3대에 걸쳐 건강 기록과 유전 정보를 모아왔다.
통상 장수 유전자 연구는 오래 산 사람 한 명의 DNA만 들여다본다. 이 연구는 다르다. '오래 사는 집안 전체'를 통째로 들여다본다.
집안 단위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유난히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자식이 있고 일찍 아프기 시작하는 자식이 있다. 개인 한 명만 보면 유전 탓인지 생활습관 탓인지 가려내기 어렵지만, 형제자매 여럿을 한꺼번에 보면 환경 변수가 상쇄되고 유전적 공통점만 도드라진다.
이 프로젝트를 활용해 라이덴 연구팀이 2025년 12월 별도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장수한 부모를 둔 중년 자녀는 그 배우자보다 심혈관대사 질환을 13년 늦게 앓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13년의 격차는 대체 어디서 비롯됐을까.
12개 후보 중 딱 하나, 두 가문에서 겹쳤다
연구팀은 같은 프로젝트의 게놈 데이터를 다시 들여다봤다. 장수 가문 형제자매 그룹 212개의 유전체를 분석, 장수와 관련 깊은 염색체 영역 4곳을 찾아냈다. 이 영역 안에 있는 유전자를 약 2만 개에서 350개로 좁혔다. 정교한 분석 끝에 단백질 구조를 바꿀 가능성이 있는 희귀 변이 12개가 최종 후보로 남았다.
이 12개 중 두 가문에서 똑같이 발견된 변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cGAS' 유전자였다. cGAS는 몸속 보안 카메라 같은 존재다. 세포 안에 있어서는 안 될 DNA, 즉 바이러스가 침투했거나 세포가 손상됐을 때 생기는 비정상 DNA를 감지해 염증 반응이라는 경보를 울린다.
다만 이 카메라는 나이 들수록 부위마다 제멋대로 반응이 변한다. 혈액이나 내장지방에서는 활동이 줄어드는데, 부신·식도·폐·피부에서는 오히려 더 활발해진다. 한마디로 "나이 들면 무조건 둔해진다"거나 "무조건 예민해진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자리마다 다르게 움직이는 까다로운 유전자다.
카메라를 끈 게 아니라, 화질을 낮췄다
연구팀은 사람과 생쥐 세포에 이 cGAS 변이를 직접 넣어 실험했다. 변이가 한 일은 단백질을 평소보다 빨리 분해시켜 신호를 약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카메라를 통째로 꺼버린 게 아니라, 계속 돌아가는 채로 화질만 살짝 낮춘 셈이다.
감염이나 진짜 손상이 생겼을 땐 여전히 경보가 울려서 몸을 지켜낸다. 그런데 별일 아닌 자극에는 호들갑을 덜 떨게 됐다. 과민 반응으로 인한 만성염증만 쏙 빠진 것이다. 실제로 이 변이를 가진 세포는 노화 신호로 꼽히는 베타갈락토시다제 양성 세포 비율이 줄었고, 세포가 분열을 멈추지 않고 더 오래 버텼다.
우리 몸의 유전자는 부모에게서 하나씩 물려받아 보통 한 쌍, 즉 두 개씩 갖고 있다. 연구팀은 장수 가문 구성원들이 이 cGAS 유전자 한 쌍 중 하나만 정상으로 활성화되고 나머지 하나는 약해진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절반을 손해 본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된 셈이다.
연구를 이끈 파스콸레 푸터 라이덴대 박사과정생은 "더 긴 건강수명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아직은 사람 적용까지 갈 길 멀다
다만 연구팀은 이 발견을 곧바로 "cGAS를 억제하면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보안 카메라를 아예 꺼버리면 정작 진짜 감염이나 암세포를 놓칠 위험이 커지고, 반대로 너무 예민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매번 경보가 울려 만성염증에 시달린다.
실제로 cGAS는 이번 연구와 별개로 이미 의학계에서 다뤄지고 있는 유전자다. 자가면역질환 치료에서는 카메라 감도를 낮추는 약을, 암 치료에서는 오히려 감도를 높이는 치료법을 각각 연구 중이다. 같은 유전자를 두고 정반대 방향의 접근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아예 끄는 것'과 '살짝 낮추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연구팀은 다음 단계로 이 변이를 킬리피시(killifish)에 도입할 계획이다. 아프리카 남동부의 우기에만 잠깐 물이 차는 웅덩이에 사는 민물고기로, 물이 마르기 전에 짧은 생애 주기를 마쳐야 해 노화 연구에서 즐겨 쓰이는 모델 생물이다. 세포 실험에서 본 효과가 실제 개체의 수명 연장으로도 이어지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당장 타고난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이번 연구가 짚어낸 핵심은 '얼마나 강한 유전자를 타고났느냐'가 아니라 '경보기가 얼마나 불필요하게 자주 울리느냐'였다.
경보기를 쓸데없이 울리게 만드는 자극 중 일부는 유전자와 무관하게 일상에서 줄일 수 있다. 흡연은 동물 실험에서 이 경보기를 직접 자극해 폐 염증을 키우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고, 비만이나 만성질환도 같은 경보기를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타고난 것은 바꿀 수 없어도, 경보기를 쉬게 해주는 일은 누구나 시도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최승욱 기자 (swchoi6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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