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종이 호랑이네” 구소련 국가들 탈러시아 가속화···대체재는 북한?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구소련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사실상 붕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우크라이나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군사적 취약점이 노출된 데다가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고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 국가들의 빈자리를 북한이 채우면서 한반도 안보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케이시 미셸 미국 인권재단 반부패 프로그램 디렉터는 지난 6월 1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는 이제 글로벌 강국은커녕 지역 강국조차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구소련 권역 전반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중재력, 경제적 영향력, 역사·문화적 헤게모니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근외’(近外·near abroad)가 사실상 붕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외는 소련 붕괴 직후인 1990년대 초 러시아 외교부가 공식화한 개념으로, 구소련 14개 독립국을 “완전한 외국이 아닌 러시아의 특별 이해관계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소련은 붕괴했지만, 러시아 중심의 연대 관계를 이어나가 지역 내 영향력을 잃지 않겠다는 포석이다.
이 근외의 논리는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돈바스 등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 거주지역에 대한 군사 활동을 외국 침공이 아닌 지역 안정을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영향력이 근외까지 미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는 논리도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이 근외를 지키려 일으킨 전쟁이 오히려 근외를 소멸시키는 계기가 됐다.

아르메니아·키르기스스탄 등 이탈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군사적·경제적 영향력은 쇠퇴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크라이나와의 접경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드론을 활용한 우크라이나군에 막혀 제대로 진군하지 못하고 있고, 최근에는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 내에 보급선과 전선에서 1000㎞ 이상 떨어진 러시아 내륙의 에너지 시설이 인공지능(AI) 기술이 접목된 무인기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
러시아는 사실상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각종 자원과 무기를 전장에 쏟아붓는 소모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에 타격을 받고 있다. 핀란드 중앙은행 산하 경제연구소(BOFIT)는 지난 3월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1% 안팎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는데, 군수 관련 제조업은 20% 성장했지만, 나머지 민간 제조업은 0.4% 성장에 불과했다.
군수 산업의 성장은 무기 수출 등을 통한 경제적 활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의 무기 수출은 2016~2020년 대비 64% 감소했다. 세계 무기 시장 점유율도 같은 기간 21%에서 6.8%로 쪼그라들었다. SIPRI는 러시아가 상위 10개 무기 수출국 가운데 수출이 감소한 유일한 국가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위상이 약화하면서 ‘앞마당’으로 여겼던 구소련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했다. 러시아로부터의 이탈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곳은 아르메니아라는 평가가 나온다. 아르메니아는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주도로 만들어진 군사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참여를 2024년 사실상 중단했다. 지난해 아르메니아 의회는 유럽연합(EU) 가입 의사를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올해 5월에는 수도 예레반에서 첫 EU-아르메니아 양자 정상회의가 열렸다.
폴란드 정부 산하 동유럽·코카서스 정책 분석기관 OSW에 따르면, 2023년 9월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했을 때 러시아와 CSTO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것이 아르메니아의 탈러시아를 결정하는 전환점이 됐다. 러시아가 군사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셈이다. WSJ는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속국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중학교 교과서에 러시아제국과 소련 시절을 ‘식민지배’로 표현하면서 러시아 중심의 역사 해석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키르기스-러시아 역사전문가협의회에서 러시아 학자들이 이 ‘식민지배’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지만, 키르기스스탄 측 역사학자들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 체제가 모두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러시아 매체 모스크바타임스에 기고한 에리카 마라트 미국 국방대학교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키르기스스탄에서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며 “젊은 세대 학자들은 소비에트화를 아프리카·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식민지배와 동등한 경험으로 본다”고 밝혔다.

북한, 가까운 동맹으로 급부상
키르기스스탄뿐이 아니다. 카자흐스탄은 소련 붕괴 후에도 한동안 러시아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이 2024년 자국의 역사적 뿌리를 소련이 아닌 13세기 중앙유라시아를 지배한 몽골계 유목 제국 킵차크 칸국으로 공식 선언했다.
다만 경제 구조상 이들 구소련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의존을 단기간에 끊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에 본부를 둔 중앙아시아 연구기관인 카스피안정책센터(CPC)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타지키스탄은 국내총생산(GDP)의 48%가 러시아발 송금으로 충당된다. 키르기스스탄 노동 이주자 60만명의 63%도 러시아에 있다.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스페셜유라시아는 러시아-카자흐스탄 양자 교역액이 지난해 290억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구소련 국가들이 탈러시아 담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자립하지 못한 경제적 현실이 괴리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구소련 국가 중 벨라루스만이 사실상 러시아의 유일한 동맹으로 남아 있다.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개인이 정치적 생존을 러시아에 기대고 있다. 1994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3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인 루카셴코 대통령은 야권 탄압과 부정 선거 논란으로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린다. 2020년에도 부정선거 논란 끝에 당선돼 러시아의 정치적 지원이 없다면 정권 유지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근외 붕괴의 상황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무게중심은 극동으로 이동하고 있다. 구소련 국가들이 친러시아 행렬에서 이탈한 사이 북한이 러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허덕이는 러시아에 포탄과 병력을 제공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러시아는 과거 구소련 국가에 했던 것처럼 북한에 군사기술을 이전해주고 경제지원을 방식으로 화답했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관계도 빠르게 다지고 있다. 지난 5월 19~20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군사·경제 분야 밀착 행보를 이어갔다. 양국 정상은 40건 이상의 무역·기술·미디어 협력 협정에 서명했으며, 2001년 체결된 양국 우호조약의 연장에도 합의했다.
시 주석은 정상회담 후 “양국 관계가 역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양국 교역액은 약 2280억달러에 달했으며, 올해 1분기 러시아의 중국 원유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 증가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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