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박완서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 개풍 박적골의 옛집 확인

2026. 6. 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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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위성 지도로 확인…20여호의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소설 <싱아는> 등서 고향이란 낙원 잃은 슬픔 비단처럼 풀어놓아
구글 위성 지도로 내려다본 박완서의 옛집 터(노란색 원). 원 뒷부분은 박완서 할아버지의 소유 밭이었다.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구글어스 자료

박완서 선생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약칭 싱아는)에 등장하는 경기도 개풍군 묵송리(현재 북한 개성시 개풍구역 묵송리)의 옛집 터를 확인했다. 작가의 반남 박씨 족보와 1930년대 일제 정밀지도를 토대로 소설 속 옛집 터를 구글 위성 지도로 찾은 결과,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는 아직도 한채의 집이 남아 있다.

소설 <싱아는>을 읽어보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박완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만년에 고향인 박적골과 비슷한 경치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 마을에서 거주하다 생을 마쳤다. 그만큼 고향 박적골은 박완서에게는 꿈에서라도 가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박적골이 개성 교외의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주소조차 알 수 없다.

박완서(1931~2011) 옛집의 주소는 정확하게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280번지’다. 그의 할아버지 박주양(朴胄陽)씨(1873~1940)가 살던 곳이다. 200평에 가까운 터로, 바로 박완서가 태어나고 자란 옛집이다. 옛집 뒤 밭 역시 박씨의 소유로, 지금은 꽤 큰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박적골 그리워…고향 닮은 구리서 생 마감

구글 위성 지도를 통해 확인해보면 박적골은 2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말굽(∩) 모양의 야산으로 둘러싸였다. 박완서는 이를 ‘삼태기 형상’(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이라고 했다. 마을 앞쪽으로 실개울이 흘러간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이다. 작가는 “넓은 벌 한가운데를 개울이 흐르고, 정지용의 시 말마따나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아무 데나 있었다”(싱아는)이라고 표현했다.

개울 옆에는 넓은 논이 펼쳐진다. <싱아는>에서는 이곳에 소작도 없었고, 너나없이 논과 밭을 소유해 평화롭게 살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1910년대 토지 지적원도를 살펴보면 이곳 인근에는 할아버지가 소유한 논과 밭도 있었다.

구글 위성 지도에서 나타난 북한 개풍 박적골의 현재 모습. 노란 원이 박적골이고, 파란 선이 박적골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다. 구글어스 자료

박완서의 옛집은 마을 사이로 난 길옆에 위치해 20여호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자체가 얕은 오르막 구조로 돼 있어 옛집에서는 남향 쪽 개울과 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다. 박완서가 개성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 장면도 이런 공간적 환경에서 나온다. 박완서는 “기둥을 한 팔로 안거나 기대고 앉아 있으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 길이 저 멀리 산모롱이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지점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싱아는)고 서술했다.

앞마당을 지나면 실개천의 상류가 올라와 있다. 소설 속에서 뒷간은 바로 이 마당에서 이 실개울을 넘어서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이 실개울은 뒤란 개나리 울타리 밖을 휘돌아서 사랑 마당과 뒷간이 있는 텃밭 사이로 흘러 내려왔고 박적골 앞에서 다른 개울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렀다.

서울 인왕산 자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싱아’는 박적골 뒷산에서는 흐드러지게 자랐다. 소설의 제목은 여기에서 따왔다. 인왕산을 헤매며 박완서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싱아는)고 표현했다.

박적골에서 박완서는 온 산을 쏘다녔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서울로 나가 방학 때 짬짬이 귀향해 박적골 뒷산을 찾았다. 그곳에는 싱아가 많았다. 소설 속 서울과 박적골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투영된다. 서울은 각박한 현실의 공간이었고, 박적골은 낙원이다.

한국전쟁은 사랑하는 오빠를 빼앗아 간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지만, 작가에게서 낙원을 상실케 한 원인이 됐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신념도, 고향과 닮은 구리 아치울 마을에서 생을 마감한 것도 낙원인 박적골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1930년대 정밀 지도에 ‘박적동(博敵洞)’이라는 한자 표기(파란색 줄)가 등장한다. 이곳이 박완서의 고향 박적골이다. 국토정보지리원 자료

작가의 딸 “어머니 키운 옛집 보고 싶다”

개성에서 20리(8㎞) 정도 떨어진 박적골은 행정명은 아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정밀지도에서는 법정동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불린 마을 이름도 괄호 안에 표기돼 있다. 묵송리 인근 지역에 ‘박적동(博敵洞)’이라는 한자 표기가 괄호 안에 등장한다. 묵송리(墨松里)는 박적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은 소나무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박완서가 늘 고향마을을 이야기하면서 ‘박적골’이라고 하는 데는 묵송리 마을과 구분 지으려는 뜻이 담겨 있다. 묵송리 마을이 아닌 박적골이 자신의 진짜 고향이라는 뜻으로 ‘박적골’이라는 세 음절을 결코 잊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이산가족이 고향을 잃어버린 채 남쪽에서 생활했다. 그들의 기억 속 낙원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개풍 박적골은 특히나 판문점에서 코앞 거리에 있었다. 손에 쥘 듯한 곳에 있지만, 고향을 잃어버린 박완서의 가슴속에는 낙원을 상실한 슬픔이 매우 컸을 것이다.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엄마의 말뚝>을 보면 박완서의 어머니가 몰래 강화도 북쪽 바닷가를 찾아간 장면이 서술돼 있다. 바다 건너 개풍군을 보기 위해서였다. 박완서의 소설에서는 오빠의 뼛가루를 강화도 북쪽 바닷가에 뿌리는 장면도 나온다. 박완서는 “바로 거기가 갈 수 없는 고향 땅 개풍군이라고 생각하면 그 지호지간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거기가 오빠의 무덤, 어머니의 상처라고 생각하면 그 바다의 너비는 가이 없었다”(<엄마의 말뚝 3>)고 표현했다.

1910년대 지적원도에 나타난, 박완서 할아버지인 박주양(朴胄陽)씨의 소유 대지(노란 부분)과 소유 밭(파란 부분).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자료

박완서의 소설은 낙원을 잃어버린 슬픔을 마치 비단처럼 펼쳐놓았다. 할아버지가 ‘에험’ 하고 흰옷을 휘날리며 동구로 들어서고, 손녀딸은 할아버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 손녀딸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할머니, 박완서를 애정 깊은 눈길로 보던 어머니, 그리고 오빠. 박적골은 소설가 박완서에게 그리운 가족이 모두 모여 있는 장소였다. 작가의 딸 호원숙 수필가는 “어머니(박완서)는 살아계실 때 지인이 보내준 개성 인근 입체지도를 보고는 좋아하셨다”면서 “구글 위성 지도에서 확인된 박적골 옛집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됐다. 올해 봄에는 후배 소설가 31명이 고른 박완서 단편집 <쥬디 할머니>(문학동네)가 출간됐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기록문화유산팀이 박완서 작가 타계 15주년을 맞아 조성한 ‘박완서 아카이브’는 6월 말까지 전시된다.

박완서는 어쩌면 15년 전 그의 고향 박적골로 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통일이 되어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개성역에서 기차에서 내려 박적골을 방문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윤호우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regnen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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