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6·25 전쟁 때 강원 평강에 원폭 6~10발…미국 극비문서에 담긴 ‘소름 돋는’ 투하 구상 [이기환의 사래자(思來者)]

2026. 6. 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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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극동군사령부가 원자폭탄 공격을 염두에 두고 1951년 9월 15일 자로 작성한 ‘지상군 근접지원 핵무기 긴급사용’ 계획이다. 이 문서에는 원자폭탄의 가상표적을 표시한 지도와 함께 시뮬레이션 자료가 첨부됐는데, 그 목표가 강원 평강지역이었다. 이기환 제공

“현재의 군사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조처를 하겠다.” 1950년 11월30일이었다. 기자회견에 나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재임 1945년 4월12~1953년 1월20일)이 아주 민감한 발언을 터뜨렸다. 기자들이 “그 모든 조치에 핵무기(원자탄)도 포함되느냐”고 계속 묻자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에도 항상 적극적인 고려가 있었다”고 답했다. 말 그대로 핵폭탄 발언이었다.

그의 발언은 유럽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벌집을 쑤셔놓았다. 동맹국들은 ‘충격과 분노(Shock and outrage)’라는 표현을 쓰면서 미국을 비난했다.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선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련이 원자탄으로 대응하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또 ‘한국에서 원자탄 사용’은 유색인종에 대해 인종차별주의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하더라도 중국·소련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동맹국들의 ‘핵무기 절대 불가’ 여론을 등에 업은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가 서둘러 트루먼과의 회담을 성사시켰다. 마침내 12월4일 열린 애틀리-트루먼의 역사적인 회담은 “핵무기가 사용될 작전사항이라면 언제든 영국 총리에게 미리 알린다”는 구두합의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트루먼의 원자폭탄 사용발언은 10일 만에 일단락된 것 같았다.

원자폭탄의 유혹

하지만 이것이 처음과 끝이 아니었다. 미국은 전쟁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원자폭탄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모두 5차례에 걸쳐 핵무기(원자폭탄) 카드를 꺼내려 했다. 첫 번째는 북한군이 기습 남침했을 때(1950년 6~9월)였다. 트루먼 행정부와 군부는 개전초부터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 특히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합참에 원자탄 20개의 신속배치를 요구했다. 맥아더는 “북한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 적의 주요 축선을 방사성 물질로 오염시킨다면 한반도를 만주와 분리할 수 있고, 최대한 10일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문서는 우선 히로시마 원자탄의 2~3배 위력인 ‘40kt 원자폭탄’을 각 지점별로 터뜨렸을 때의 피해 예상값을 산정했다. 투명한 템플릿을 핵 타격 중심점(그라운드 제로)에 놓고 피해규모를 추정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a)병력=사상자 85%’(1000~3000명), ‘b)보급품 및 통신센터=파괴 100%’, ‘c)지상 계류 항공기=100% 파괴’ ‘d)차량 및 철도=75% 파괴’(화차 1000칸 또는 차량 3000대) 등으로 상정했다. 이 기준을 충족해야 ‘핵무기 사용에 적절한 표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기환 제공

그러나 첫 번째 핵무기 사용의 고비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됨으로써 소멸하였다. 이어 맨 앞에 인용한 두 번째 위기(1950년11~12월)가 찾아왔다. 파죽지세로 한·만 국경까지 밀고 올라간 유엔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한다. 소련의 미그-15기가 투입되고,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자 다시 핵무기 카드가 나온 것이다.

이에 고무된 맥아더 사령관은 “핵폭탄을 북·중 국경지대에 집중적으로 투하하면 전세를 재역전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맥아더는 핵 공격 대상 목록을 행정부에 제출하는 한편, 26개의 원자탄 사용을 요구했다. 4개는 북한의 공산군에, 4개는 ‘적 공군력의 핵심기지’에, 그리고 나머지 18개는 적의 군사 및 산업 중심지에 투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핵무기 사용의 유혹은 폐기됐다.

‘1951년 4~5월’도 위험했다. 소련이 항공기와 3개 사단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서가 트루먼에게 보고됐다. 이 시기는 중국이 대대적인 춘계공세를 펼치던 때였다. 트루먼은 ‘정말로’ 원자폭탄의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4월6일 트루먼 대통령은 9개의 ‘마크-4(Mark-Ⅳ)’ 원자탄을 괌으로 이관 시켜 달라는 미 합참의 요청을 승인했다. 이로써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원자탄이 해외로 배치됐다.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이때 트루먼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목표물’에 ‘마크-4 원자탄’을 투하하는 명령서에 사인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핵무기 투하계획은 다시 ’숨겨진 카드’로 남았다. 맥아더 해임(4월15일)을 둘러싼 혼란이 생긴 데다 중국이 대대적인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소련의 유엔대표 야코프 말리크가 정전협상을 전격 제안함(6월23일)으로써 핵 위협은 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핵 공격과 융단폭격

그러나 1951년 7월10일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이 중단·결렬될 때마다 ‘핵 카드’를 커내고 싶어 안달했다. 특히 9월과 10월에는 B-29 중폭격기들이 단독비행의 형태로 오키나와 기지를 이륙했다. 전폭기들은 원폭 투하 모의출격에 나서 북한상공에서 ‘모조 핵탄두(Dummy A-bombs)’와 대형 TNT 폭탄을 투하했다. 인구밀집지역이나 산업기지와 같은 곳에 터뜨리는 전략적인 목적의 핵무기가 아니었다. 바로 개별 전쟁터에서 핵무기를 투하하는 ‘전술적인’ 사용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모의 작전에 나선 것이다. 이 ‘모의 핵’ 공격훈련을 ‘허드슨 하버 작전(Operation Hudson Harber)’이라 했다.

하지만 이 위험천만한 계획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우선 북한은 소국인 데다가 산악지형이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니 중국군과 북한군의 병력 이동 등을 식별·대응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또 당시 북한에는 핵폭탄을 투하할만한 대규모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유엔군의 융단폭격 때문이었다. 북한의 22개 대도시 중 18개 도시가 파열탄과 소이탄 공격으로 초토화했다. 예컨대 주요 산업 도시인 함흥과 흥남은 80~85%, 사리원은 95%, 신안주는 100%, 항구 도시인 진남포는 80%, 평양은 75% 파괴되었다.

미군당국은 철의 삼각지대의 맨 위 꼭짓점인 평강에 약 9500명의 공산군이 3곳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차량 270여대와 비행장(제트기 25대·쌍발 엔진 8대 및 100대 수용 항공시설), 군수보급기지 및 철도시설, 대공포 진지 등이 집중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곳의 중심 지점을 가상 표적으로 정했다.

미군당국은 철의 삼각지대의 맨 위 꼭짓점인 평강에 약 9500명의 공산군이 3곳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차량 270여대와, 비행장(제트기 25대·쌍발 엔진 8대 및 100대 수용 항공시설), 군수보급기지 및 철도시설, 대공포 진지 등이 집중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곳의 중심 지점을 가상 표적으로 정했다. 이기환 제공
아이젠하워의 ‘개성 투하론’

이후에도 미국의 핵카드는 포기되지 않았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머물렀고, 일진일퇴의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개전 때부터 미국 대통령선거일(1952년 11월4일)까지 미국의 인명 손실은 전사자 2만1000명, 부상자 9만1000명, 행방불명 1만3000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런 상황에서 펼쳐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전쟁의 조기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아이젠하워는 “전쟁비용과 미군 사상자를 줄이고 공산군의 의지를 꺾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다면 원자탄 투하가 매우 경제적”이라고 고집했다. 이와 함께 미국 측은 원자폭탄이라는 ‘절대무기’를 정전회담의 협상카드로도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사망(1953년 3월5일)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결국 1953년 7월27일 3년1개월2일간 지속한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궁금증이 든다. 미국은 한국전쟁 내내 만지작거렸던 ‘핵 카드’를 대체 어느 곳에 쓰려고 했던 것일까.

우선 휴전 후 31년이 지난 1984년이 되어서야 공개된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제131차 회의록(1953년 2월11일)에 1곳이 등장한다. 이날 CIA국장 대행인 앨런 덜레스는 “정전협상 과정에서 조성된 ‘개성 중립구역’에 공산군 측의 병력과 물자들이 가득 차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정전 협상이 지지부진한) 현재와 같은 상황을 무기한 지속할 수는 없다”면서 불쑥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낸다. “개성 지역은 ‘전술 핵’ 같은 유형의 무기에 적절한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만약 휴전회담이 결렬되었거나 지지부진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서울에서 60㎞ 떨어진 개성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핵무기 가상표적=평강’

그런데 개성 한 곳뿐이 아니었다. 미국이 전쟁 내내 핵무기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염두에 둔 ‘핵심 표적’이 또 있었다. 바로 ‘철의 삼각지대’로 일컬어진 ‘평강-철원-김화’ 지역과 임진강 일대였다. 이 중 ‘평강’은 가장 유력한 ‘핵무기 가상표적’으로 낙점된 곳이었다. 즉 미 국방부는 극동군사령부와 긴밀한 협의 끝에 ‘지상군 근접지원 핵무기 긴급사용(Emergency Use of Atomic Bombs in Close Supports)’계획을 세웠다.(1951년 9월15일) 앞서 언급한 허드슨 하버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 문서에는 원폭 투하 목표를 나타낸 지도와 함께 설명자료가 첨부됐는데, 그 목표가 강원 평강지역이었다. 이 기밀문서는 1995년 당시 일본 릿쿄대(立敎大) 아라 다카시(荒敬) 강사가 워싱턴 국립공문서에 보관된 극동군 문서철에서 찾아냈다. 일부 언론에 발굴 사실이 보도됐다. 하지만 당시 ‘평강 가상표적’을 표시한 지도가 포함된 원문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미국의 핵무기 운용정책과 관련해서 단편적인 자료로 인용되었을 뿐이다.

가상표적으로 지정한 평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화산인 오리산까지는 불과 4km 정도 떨어져 있다. 오리산은 ‘제4기 홍적세(200만년~1만년전) 이래 10차례 이상 용암이 분출된 곳이다. 물론 지금은 사화산으로 분류되어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오리산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진단이다. 그렇더라도 용암 분출 경력이 화려했던 오리산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핵무기 가상표적을 만든 것은 문제가 있다. 이기환 제공

그런데 필자는 최근 ‘지상군 근접지원 핵무기 긴급사용’ 문서의 원문을 일본국회도서관 사이트에서 내려받을 수 있었다. 이 자료는 미국 국립공문서관(NARA)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였다. 일본 국회도서관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 도쿄(東京) 극동군사령부와 관련된 ‘일본 점령 관계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이 문서를 입수했다. 도서관은 2015년부터 4년간의 디지털화 과정을 거쳐 2019년 3월12일 이 자료를 인터넷으로 전면공개했다.

필자가 찾아낸 원문 전문을 한번 살펴보자. 모두 15쪽으로 된 이 문서의 제목은 <핵무기 표적 분석(ATOMIC TARGET ANALYSIS (1951)> 문서다. 표지의 상·하단에 ‘극비(1급비밀)’가 찍혀있다. 표지의 맨 밑 부분에는 1951년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문서의 처음 5장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각 표적 종류별로 파괴 범위를 표시한 것이다. 즉 5장의 투명 템플릿(틀·셀로판지 혹은 비닐)에는 각 표적 종류별로 원과 피해규모(사상률 및 파괴율)를 표시해두었다. 40kt급 원자폭탄(마크-4·히로시마 원자탄의 2~3배 위력)을 각 표적에 터뜨렸을 때의 피해 예상값을 미리 산정해둔 것이다.

표적별 원의 크기 및 형태와 기록된 피해규모는 실전(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및 다수의 핵실험 데이터 등을 토대로 미리 계산해놓은 기준값(표준 예측 수치)다. 표적 5개는 a)주둔병력, b)보급 및 통신 센터, c)지상 계류 항공기, d)차량 및 철도, e)함선(항공모함 및 수송선) 등이다. 그랬을 때 ‘병력 사상자 85%’(핵심밀집지역 1000명, 비핵심지역 3000명), ‘보급품 및 통신센터 파괴 100%’, ‘지상 계류 항공기 100% 파괴’ ‘차량 및 철도 75% 파괴’(화차 1000칸 또는 차량 3000대) 등으로 상정했다. 이 기준을 충족해야 ‘핵무기 사용에 적절한 표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작전 장교는 지도 위에 투명 템플릿을 올려놓고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핵폭탄이 터지는 지점)을 선정한다. 그런 다음 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거리별로 어느 정도의 병력과 장비가 파괴되는지를 합산하여 총 피해 예상값을 추정한다.

평강에 원자폭탄 터뜨리면…

이렇게 ‘적절한 표적’의 기준을 제시한 문서는 본격적으로 ‘핵무기 가상표적(HYPOTHETICAL TARGET UNDER CONSIDERATION FOR ATTACK BY ATOMIC WEAPONS)=평강’을 두고 시뮬레이션에 들어간다. 왜 평강이었을까. 평강은 한국전쟁 내내 요충지 중 요충지로 꼽힌 ‘철의 삼각지대’(철원-평강-김화) 중 가운데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공산군은 이곳에 병력과 물자를 집중시켜놓고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핵무기 한 발로 얼마만큼의 피해를 주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로 꼽았다.

당시 평강에는 적군 약 9500명이 3곳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었고, 차량 270여대와 비행장(제트기 25대·쌍발 엔진 8대 및 100대 수용 항공시설), 군수보급기지 및 철도시설, 대공포 진지 등이 집중된 것으로 파악됐다. 미군 당국은 평강에 주둔한 공산군의 전력 분포를 5만분의 1지도에 표시한 뒤 그라운드 제로를 선정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평강 석교리~복계리’ 사이에 표시되어 있다.

그라운드 제로는 ‘적군 4000명(참호 등에 은·엄폐)+차량 200대’, ‘군수품 보급지역 및 철도시설’, ‘적군 2500명+차랑 100대’ 등이 몰려있는 곳의 한가운데 지점이었다. 그래놓고 투명 템플릿의 영점을 그라운드 제로에 중첩한 뒤 피해를 산정했다. 그라운드 제로에 40kt급 원자폭탄을 투하할 경우 얼마만큼의 피해가 예상되는지 알아본 것이다.

보고서는 1950년 12~51년 1월초 원주에 집결한 북한군에 원자탄 2발을 투하했을 경우 1만8000명 중 6000~9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기환 제공

템플릿의 원 중심부에 들어오는 병력은 90% 이상 멸실(사망 및 중상), 중간선에 걸치는 병력은 30% 사상하는 식으로 지형·지물 내 적의 피해 총량을 합산(Aggregate damage)했다. 문서에는 계산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적군 병력의 경우 예상 사상자 수는 ‘(0.9×2500+0.3×4000)×0.85=2900’으로 계산됐다. 노출된 병력 2500명 중 90%가, 참호 등에 엄폐된 4000명 중 30%가 각각 죽거나 다칠 것으로 추정했다. 여기에 지형적 변수 등을 고려한 보정 값(0.85)을 곱했다. 그렇게 계산하면 그라운드 제로와 가깝게 주둔한 공산군 6500명 가운데 2900명이 즉사하거나 치명상을 입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군수보급구역과 비행장 및 그 시설, 비행기(제트기 25대 및 쌍발엔진 8대) 등은 100% 파괴되는 것으로 계산됐다. 이밖에 화차 112량과 차량 45대도 파괴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40kt급 원자폭탄 한 발로 평강에 집결된 공산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임진강 유역 공산군 전력의 집결지에 6발의 핵무기를 투하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은 임진강 유역에 모두 12만명의 공산군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기환 제공

필자는 이 대목에서 지도상의 그라운드 제로, 즉 핵무기 폭발지점에서 서남쪽 가까운 거리에 보이는 ‘압산’(오리산·해발 453m)에 주목했다. 오리산은 제4기 홍적세(200만년~1만년전) 이래 10차례 이상 용암이 분출된 곳이다. 물론 27만 년 전 이후 화산 활동이 없기에 사화산으로 분류되어 있다. 따라서 원자폭탄 투하로 오리산이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게 화산학자(윤성효 부산대 명예교수)의 진단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용암 분출 경력이 화려했던 오리산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핵무기 가상표적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물론 1951년 9월15일 작성된 이 지도는 제목 그대로 ‘가상표적(HYPOTHETICAL TARGET)’이다. 그 무렵 실시한 모의 핵 공격 훈련인 허드슨 하버 작전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평강 같은 특정 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게 아니라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파괴 효과를 시뮬레이션했을 뿐이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임진강변, 철의 삼각지대, 원주에 6~12발?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과연 평강은 가상표적으로만 남았을까. 필자는 관련 자료를 추적해가다가 최근 더 충격적인 문서를 발굴했다. 그것이 존스홉킨스대 합동작전연구실(ORO·Operations Research Office)이 극동군사령부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핵무기의 전술적 운용(Tactical Employment of Atomic Weapons)> 보고서다. 그런데 보고서 첫머리에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원자탄의 사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실이었다.

1951년 3월1일 극동군사령부에 올린 보고서에는 3곳의 핵무기 타격 목표지점이 설정되고, 무려 6~12발의 원자폭탄 투하가 고려되었다. 그 3곳은 ‘철의 삼각지대’(평강-김화-철원)와 임진강 유역, 그리고 원주 등이다. 이 3곳은 1950년 11월 중순 이후 남하한 중국군·북한군이 집결해있던 지역이었다.(이중 원주의 경우 1951년 1월20일 이후 공산군이 퇴각했다. 그러나 1~2월 사이에 연구된 보고서에는 2발의 원자폭탄 투하 대상지에 포함되어 있다. 2발의 원자폭탄 투하에 공산군 1만8000명 중 6000~9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됐다.)

보고서의 핵심 표적은 임진강과 가까운 철의 삼각지대(평강-김화-철원)였다. 미군 정보부는 철의 삼각지대에 공산군 6만5000~9만5000명(1951년 12월 말)이 집결한 것으로 파악했다. 보고서는 공산군의 전력이 집중된 철의 삼각지대를 원자폭탄 공격에 ‘더 유리한 표적이라고 표현하면서 두 가지 안을 올렸다 . 이기환 제공

임진강 북쪽 공산군 전력의 집결지에 6발의 핵무기를 투하할 계획을 세웠다. 보고서는 투하하는 폭탄 사이의 최소 간격(17㎞), 원자 구름이 상승하는 등의 시간 간격(5분), 비행경로 사이의 거리(5만 야드·46㎞) 등을 세밀하게 계산했다. 정리하자면 약 5분 이내에 최대 시간내에 약 50㎞ 거리의 적진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핵심 표적은 임진강과 가까운 철의 삼각지대(평강-김화-철원)였다. 보고서는 평강-김화-철원은 각 변의 길이 20㎞ 정삼각형을 이룬다고 했다. 미군 정보부는 이 철의 삼각지대에 공산군 6만5000~9만5000명(1950년 12월 말)이 집결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 병력은 임진강 변을 오르내리며 유엔군의 방어선을 공격하곤 했다.

보고서는 공산군의 전력이 집중된 철의 삼각지대를 원자폭탄 공격에 ‘더 유리한 표적(lucrative target)’이라 표현했다. 그런 탓일까. 보고서는 두 가지 안을 올렸다. ‘6발 투하’와 ‘10발 투하’ 계획이었다. 6발 안의 경우 정삼각형 형태의 ‘평강-김화-철원’은 6개 원 표적으로 중첩되지 않게 40kt급의 원자탄을 투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10발’은 한술 더 뜬다. 40kt급 핵폭탄을 10개 떨어뜨리면 중첩되게 더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6발’일 경우 평균 지역 사상자 비율은 40~50%, ‘10발’의 경우 평균 사상자 비율은 60~70% 사이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그렇다면 ‘6발’의 경우 적 병력 ‘6만5000~9만5000명’ 가운데 ‘3만~4만5000명’(40~50%), ‘10발’의 경우 ‘5만7000~6만6000명’(60~70%) 정도가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대목에서 보고서의 표현이 기가 막힌다. “전술적 용도의 원자무기가 충분히 비축되어 있다면 ‘10발 투하’가 ‘더 매력적’(The more attractive)이다.’

‘전술핵무기’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군이 핵무기의 전략적인 목표, 즉 도시 중심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도로 결절점과 계곡, 마을, 병력 집결 예상 지역을 중심으로 조준점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전술 핵공격의 개념을 세운 것이다.

‘10발’은 더 충격적이다. 40kt급 핵폭탄을 10개 떨어뜨리면 중첩되게 더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이기환 제공

그러나 이 보고서는 결국 채택되지 못한다. 이 보고서가 올라오자 극동군사령부는 “(현 단계에서) 적 1개 사단에 원폭 10발을 투하하자는 것은 과도한 제안이며 전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법칙에 어긋난다”며 신중론을 개진했다.(1951년 7월20일) 결국 6~10개에 달하는 원자폭탄 투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6개월 뒤인 1951년 9월15일 ‘평강 핵무기 가상 표적’을 작성하는데 기본자료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가 막힌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단 1발로도 도시 하나가 마비되는 핵무기를 1개 지역이나 1개 사단을 상대로 6~10발이나 쓰겠다고 계산했다. 얼마나 무지막지한가. 생각해보면 1951년 당시엔 핵무기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방사능 낙진이나 환경 오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미군은 핵무기를 ‘파괴력이 아주 강력하고 거대한 재래식 폭탄’의 연장선으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또 당시 중국군은 전 전선에 갱도를 파서 은폐하고 밤에만 이동하는 분산전술을 썼다.

그래서 적의 퇴로를 끊고 전선 전체를 지우기 위해 6~10발이라는 무자비한 폭격을 생각해낸 것이다. 곱씹어보면 미군이 1951년 마련한 두 개의 보고서는 단순한 ‘가상용’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트루먼·아이젠하워 두 미국 대통령 중 한 사람이라도 ‘핵 버튼’을 눌렀다면 어찌 되었을까. 한반도 개성-임진강변-평강 등 철의 삼각지대가 원자폭탄으로 불바다를 이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찔하지 않은가.

※이 기사를 위해 양영조 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과 유진석 숙명여대 교수 등이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유진석, ‘핵 억지 형성기 최초의 전쟁으로서 6·25 전쟁과 미국의 핵전략’, <한국과 국제정치> 제27권2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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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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