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세계 챔피언을 향한 내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신보미레의 패배가 다시 박수받은 이유

김종석 기자 2026. 6. 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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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서 다큐멘터리 특별 상영회
– 로열 앨버트홀·매디슨 스퀘어 가든 거친 한국 여자복싱의 세계 도전
– “다음은 라스베이거스”…여성 스포츠계도 지원 방안 모색
신보미레 다큐멘터리 특별 상영회가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열린 가운데, 신보미레가 관객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노사이드 제공

 복싱에서 패배는 대개 숫자로 남습니다. 판정패, 0-3, 스코어카드. 하지만 어떤 패배는 숫자로만 정리되지 않습니다. 최근 서울 성동구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8층 라운지에서 열린 신보미레(32) 다큐멘터리 특별 상영회는 바로 그런 패배의 의미를 다시 묻는 자리였습니다.

 여성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기업 노사이드(NOSIDE·대표 정지원)가 마련한 이날 상영회에는 복싱 팬, 여성 스포츠 관계자, 일반 관객, 스포츠 기자들이 함께했습니다. 화려한 조명이나 대형 경기장의 함성은 없었지만, 분위기는 진지하고도 따뜻했습니다. 관객들은 한 선수의 승패를 소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세계 무대까지 갔는지 함께 확인하러 온 듯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상영 뒤에는 신보미레와 제작진이 참여한 관객과의 진솔한 대화가 이어졌고, 질문은 경기 결과보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원동력, 성장 정체기를 극복하는 방법, 세계 무대에서 얻은 배움, 여성 스포츠 환경의 차이로 향했습니다.

 1994년에 태어난 신보미레는 '일찍부터 선택받은 복싱 유망주'가 아니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후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글러브를 꼈고, 열악한 훈련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자신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내 무대를 평정했고, 아시아에서도 강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늘 링 위에서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가 그를 버티게 했습니다. 그래서 신보미레의 세계 도전은 우연한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선수,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선수, 그래도 끝까지 링을 떠나지 않은 선수가 복싱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세계 챔피언 앞에 선 장면이었습니다.

관객들이 신보미레의 세계 타이틀전 도전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지켜보고 있다. 노사이드 제공

 지난해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신보미레는 WBC 여자 라이트급 챔피언 캐롤라인 뒤부아에게 도전했습니다. 올해 4월에는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링에 섰습니다. 상대는 WBA·IBF·WBO 여자 슈퍼 페더급 통합 챔피언 알리시아 바움가드너였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명승부가 열린, 복서들에게는 성지 같은 공간입니다. 신보미레는 그 무대에서 10라운드를 끝까지 버텼고, 0-3 판정패를 당했습니다. 스코어는 92-98, 92-98, 91-99였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챔피언 등극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이날 다큐멘터리가 비춘 것은 패배 자체가 아니라, 그 패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작은 체육관에서 출발한 한국 여성 복서가 런던과 뉴욕의 상징적인 링에 오르기까지 어떤 시간을 견뎠는지, 챔피언의 속도와 힘을 몸으로 겪은 뒤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다시 왜 링을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었습니다. 힘겨운 계체량 과정, 결전을 앞두고 목디스크로 고생하는 모습 등은 관객의 콧등을 찡하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상에는 신보미레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그의 힘든 여정에 동반자가 돼 온 두 코치의 애환도 담겼습니다. 세계 무대에 선 선수 뒤에는 훈련 일정을 잡고, 몸 상태를 살피고, 패배 뒤 흔들리는 마음마저 함께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신보미레를 다시 링 위에 세우기 위해 버텨온 코치들의 표정과 말은, 그의 도전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줬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선수와 코치, 작은 팀이 함께 버틴 시간의 기록이기도 했습니다.

신보미레가 다큐멘터리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계 무대 도전 과정과 앞으로의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사이드 제공

 상영회에서 신보미레는 세계 정상과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김세훈 경향신문 부장의 질문에 대해 "앞으로 3~5번 더 도전하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막연한 희망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로열 앨버트홀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직접 챔피언의 거리, 타이밍, 경기 운영을 겪은 뒤 나온 현실적인 자신감에 가까웠습니다. 패배를 끝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다음 도전을 위한 데이터로 삼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목적지도 이미 머릿속에 있습니다. 신보미레는 앞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링에 오를 계획입니다. 런던 로열 앨버트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그리고 라스베이거스. 세계 복싱의 상징적인 무대를 하나씩 통과하고 있는 그의 여정은 패배의 기록이라기보다 세계 챔피언으로 가는 노선도에 가깝습니다.

 신보미레의 경력은 한 번의 세계 타이틀전으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WBO 아시아태평양 챔피언, WBC 인터내셔널 챔피언, WBA 아시아 라이트급 챔피언을 거치며 꾸준히 세계 랭킹을 쌓아왔습니다. 국내 여자복싱의 저변이 넓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 랭킹을 유지하고, 체급을 오가며 원정 타이틀전에 나서는 일은 전혀 가볍지 않습니다.

이진숙 한국 여성 스포츠회 회장, 신보미레, 황정희 한국 여성 스포츠회 부회장이 상영회를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노사이드 제공

 이날 행사에는 이진숙 한국 여성 스포츠회 회장(대한체육회 부회장·동아오츠카 전무), 한국 여자야구연맹 회장을 역임한 황정희 한국 여성 스포츠회 부회장 등 여성 스포츠계 인사들도 참석했습니다. 이 회장은 "신보미레 선수의 열정과 투혼을 담은 영상에 큰 감동하였다. 앞으로도 포기라는 단어를 몰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 역시 뒤늦게 하키 선수를 시작해 대학에 입학하고 국가대표가 됐으나 부상 탓에 은퇴하는 시련을 겪었다"라며 "신보미레 같은 여성 스포츠 선수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지원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한 여성 복서의 세계 도전이 여성 스포츠계 선배들의 경험과 맞닿으며, 이날 상영회는 '신보미레의 이야기'를 넘어 '다음 신보미레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성 스포츠에서 기록은 때로 경기 결과보다 더 중요합니다. 남성 스포츠의 역사는 중계 화면, 기사, 다큐멘터리, 회고록으로 반복 재생됩니다. 반면 여성 선수들의 도전은 대회가 끝나면 금세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사이드가 3년 전부터 신보미레의 여정을 따라간 이유도 이 지점에 있습니다. 한 여성 복서가 어떤 환경에서 훈련하고, 어떤 두려움과 싸우고, 어떤 마음으로 세계 챔피언 앞에 서는지를 남기는 일은 곧 여성 스포츠의 자산을 만드는 일입니다.

 신보미레는 아직 세계 챔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한국 여성 복싱의 장면을 바꿔놓았습니다. 대학교 입학 후 늦게 글러브를 낀 선수가 국내와 아시아 무대를 거쳐 런던과 뉴욕의 링에 올랐고, 이제 라스베이거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패배 뒤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도 그를 향해 결코 루저가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날 행사를 관통한 신보미레의 인생관은 어쩌면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는 복싱을 통해 "내가 세상에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아나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챔피언 벨트만을 향한 욕망이라기보다, 링 위에서 맞고 버티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보미레에게 복싱은 직업이자 경기이고, 동시에 자신을 세상과 연결하는 언어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날 상영회는 한 경기의 뒤풀이가 아니라, 다음 도전을 준비하는 조용한 출정식처럼 보였습니다. 복싱은 결국 혼자 링에 오르는 스포츠입니다. 그러나 한 선수의 도전이 기록되고 공유될 때, 그는 더 이상 혼자만의 이야기를 싸우지 않습니다. 패배도 기록될 때 서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서사가 쌓일 때, 한국 여성 복싱의 다음 도전자는 조금 덜 외롭게 링에 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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