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애플 메모리 날갯짓이 한국엔 태풍으로…‘K자 양극화’ 심화 우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인텔·애플 등 거대 테크 기업들의 공급망 전략 수정과 인공지능(AI) 투자가 맞물린 외생 변수로 촉발됐다. 업계에서는 이번 슈퍼사이클이 3~4년 주기로 반복되던 기존 수요 곡선과 달리 기조적 흐름으로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내다본다. 반도체발 이익 쏠림이 장기화되면 산업 구조와 임금·소득, 자본·자산 등 영역에서 한국 사회의 다중격차가 심화할 공산이 크다. 반도체발 양극화의 전개 양상을 세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공식 조달망과 별개로, 시피유와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는 물밑에서 사전 물량 교감을 거치는 것이 업계의 숨은 관행이다. 그러나 이를 건너뛰고 사람의 뇌 구실을 하는 시피유가 시장에 대거 쏟아져나오자, 이와 짝을 이루는 메모리 수요까지 빨아들였다. 시피유가 연산을 담당한다면 메모리는 데이터를 저장·공급하는 역할을 맡는 만큼, 시피유가 늘어날수록 이를 뒷받침할 메모리도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를 낳은 셈이다.
글로벌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의 인공지능(AI) 투자에 더해, 거대 테크 기업의 공격적 경영 판단이 맞물려 빚어진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기세가 거세다. 최대 수혜 기업인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올해 합산 영업이익 전망치는 약 620조원(이하 에프앤가이드 집계 기준)에 이른다. 내년 영업이익 전망값은 약 830조원으로, 추경 기준 올해 정부의 총지출(753조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여기엔 미국 애플도 한몫했다. 애플 관리자들은 자체 공장 없이 스마트폰·태블릿 등을 위탁 생산하면서도 한번도 납품 차질을 빚은 적 없는 ‘공급망 관리의 왕’으로 불린다. 업계 관계자는 “인텔의 영향으로 당시 메모리 수급 불안 조짐이 일자, 전세계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이직한 애플 출신들이 즉각 재고 확충에 나섰다”고 했다. 메모리 가격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진 배경이다.
반도체 호황은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 경제에 ‘축복’이다. 하지만 그 성취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경제 전반의 ‘반도체 쏠림’이 장기화하면 국내 산업은 물론 기업·노동자 간 격차가 확대되고, 불균형과 양극화도 심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은 “반도체 초호황으로 국가 경제에서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고, 소수 기업에 이익이 집중돼 빈부 격차 확대로까지 이어진다면, 산업 생태계 다양성이 약화되고 경제 전반의 불균형도 심화될 수밖에 없다”며 “이는 우리 경제에 또 다른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양극화를 심화시킬 ‘반도체 독주 체제’가 더욱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 경쟁에서 승기를 잡으려는 빅테크들의 투자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한 반도체 제조사들이 공급을 단기간에 늘리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향후 신규 반도체 공장이 속속 들어서 메모리 가격이 하향 안정세를 보이게 되더라도, 인공지능 혁신을 떠받치는 인프라 투자 붐 자체는 계속될 것이라는 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 요인이다. 과거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혁명의 투자 확대 추세도 10년가량 지속된 바 있다. 격차 완화를 위한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메모리 시장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표들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와 미국 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의 올해 연간 디(D)램 웨이퍼(반도체 원판) 생산량 전망치는 지난해보다 6.1% 증가한 1842만장으로, 생산 증가폭은 전년(7.4%)에 견줘 축소됐다. 앞선 업황 급락으로 실적 악화를 겪은 기업들이 그동안 신규 투자에 보수적으로 접근한 결과다.
반면 빅테크들의 투자 수요는 본격적인 증가세를 보이며 메모리 기업들의 몸값을 키우고 있다. 미국 전미경제연구소가 이달 펴낸 보고서를 보면, 구글(알파벳)·마이크로소프트·메타·아마존·오라클 등 주요 5개사의 연간 인공지능 인프라 투자액은 지난해 3810억달러(572조원)에서 내년에는 1조900억달러(1635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제이피(JP)모건은 디램의 경우 2028년까지, 낸드플래시는 적어도 올해까지 공급 부족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공급 부족이 해소되면서 찾아올 반도체 슈퍼사이클 둔화가 곧 메모리 기업들의 불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 마틴 인공지능 거버넌스 이니셔티브가 지난 2월 펴낸 보고서를 보면, 글로벌 인공지능 시장은 2033년까지 독일 경제 규모와 맞먹는 4조8천억달러(720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 역시 단기적인 이익 둔화는 있을 수 있으나, 중장기적인 인공지능 인프라 투자 붐에 따른 수혜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병호 고려대 휴먼 인스파이어드 인공지능연구원 연구교수는 “피지컬 인공지능과 로봇 등으로 인공지능 산업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며 관련 투자가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권남훈 원장은 “반도체 초호황 장기화에 따른 우리 경제의 불균형이 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반도체에서 나오는 이윤이 경제 구석구석에 잘 흘러들어갈 수 있게 정부·산업 차원의 실효성 있는 대응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배지현 기자 bee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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