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가 쇼가 됐다… 록시 하트는 왜 스타가 됐나
뮤지컬 '시카고'의 빌런들이 만든 '편집된 서사'
편집자주
현실에선 피해야 할 상대지만 무대 위의 빌런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축입니다. 공연 담당 김소연 기자가 매력적인 무대 위 대항자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1920년대 미국 시카고. 내연남을 살해한 여성들이 잇달아 법정에 섰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사건의 진실에 있지 않았다. 신문은 증거와 재판 과정보다 그들의 이목구비와 옷차림, 사연을 대서특필했다. 살인범은 순식간에 악당이 아니라 유명인이 됐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도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의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진이 화제가 되고, 검찰 출석 모습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덮는다. 범죄자는 어느새 뉴스 주인공이자 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당시 시카고 법정을 취재하며 이들 사건을 쭉 지켜본 모린 댈러스 왓킨스 기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그는 실제 살인 피의자 뷰라 애넌과 벨바 가트너를 소재로 1926년 희곡 '더 브레이브 리틀 우먼'을 썼다. 이후 이 작품은 연극 '시카고'로 무대화됐고, 훗날 동명의 뮤지컬로 이어졌다. 애넌을 모델로 삼은 록시 하트와 가트너를 모델로 삼은 벨마 켈리가 주인공이다.
뮤지컬 '시카고'는 한국 배우 아이비가 8월 록시 하트 역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하게 되면서 재차 화제가 됐다. 앞서 올 초에는 리얼리티쇼로 유명해져 SNS 스타가 된 휘트니 리빗이 이 역할을 맡았다. 평범한 사람이 범죄로 유명인이 되는 이야기에 실제 인플루언서가 캐스팅된 것이다. '시카고'는 100년 전을 그렸지만 마치 지금의 미디어 사회를 먼저 본 듯한 이야기다.
록시 하트, 최초의 범죄 인플루언서

뮤지컬 '시카고'는 록시와 벨마, 두 빌런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 사법 제도의 모순과 선정적 언론 등을 풍자한다. 브로드웨이의 전설적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밥 포시가 존 칸더(작곡), 프레드 엡(작사)과 함께 1975년 처음 선보였다. 이를 연출가 월터 바비, 안무가 앤 레인킹이 1996년 리바이벌한 버전이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고 있다.
록시는 내연남을 살해한 확실한 빌런이지만 자신을 순진한 피해자로 포장한다. 재판 과정에서 매력적인 외모와 비극적인 사연으로 대중의 동정을 얻었고, 무죄 판결을 받아 당당히 교도소 밖으로 걸어 나갔던 애넌과 꼭 닮은 꼴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록시는 범죄를 저지른 뒤에야 처음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이 록시를 스타로 만들었다. 그래서 록시는 죄책감보다 카메라 플래시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관심은 그에게 형벌이 아니라 보상이다.
록시는 진실보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실보다 그 뒤에 숨은 멜로드라마가 관심을 끈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가련한 표정을 짓고, 대중이 동정할 만한 서사를 급조해낸다.
록시는 SNS가 없던 시대의 인플루언서였다. 법정에 출석한 피의자의 스타일이 '블레임 룩'으로 불리며 온라인 커뮤니티를 장식하는 오늘날 모습의 원형인 셈이다. 1920년대의 신문 1면이 2020년대에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빌리 플린, 범죄를 상품으로 만드는 남자

하지만 이 뮤지컬을 진정한 '빌런들의 판'으로 완성하는 인물은 록시가 아닌 변호사 빌리 플린이다.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한 일탈이었던 록시의 살인은, 빌리가 개입하는 순간 대중을 기만하는 엔터테인먼트 상품이자 완벽한 사기극으로 탈바꿈한다.
빌리는 스타 변호사지만 정의의 수호자는 아니다. 그는 사건을 법정이 아니라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 만든다. 범죄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종의 프로듀서다.
그의 악마 같은 재능은 한국 관객에게 SNS로 가장 널리 알려진 넘버 '서로 그 총을 뺏으려 했네(We both reached for the gun)'에서 강렬하게 드러난다. 빌리는 기자들 앞에서 록시를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마치 복화술 인형처럼 조종한다. 록시는 입을 움직이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빌리다. 그의 목소리가 록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기자들은 그것을 받아 적는다. 진실이 아닌 '편집된 서사'가 사건을 규정하는 순간이다. 그 덕분에 록시는 살인범이 아닌 동정을 자아내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다. 빌리는 사건의 실체보다 이미지가, 진실보다 내러티브가 더 큰 힘을 갖는 오늘날 미디어 전략가와 흡사한 역할을 한다.

신문 1면 헤드라인에서 SNS 피드로

뮤지컬 '시카고'는 살인범 록시와 그를 스타로 만든 변호사 빌리를 넘어서는 진짜 빌런을 겨눈다. 바로 범죄를 상품으로 만드는 언론과 이를 도파민 삼아 기꺼이 소비하는 대중이다.
작품은 살인범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미디어와 쇼비즈니스, 그리고 대중의 욕망이 결합할 때 범죄자조차 어떻게 매력적인 스타가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 관객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여죄수들이 각자의 살해 이유를 노래하는 넘버 '셀 블록 탱고'의 관능적이면서도 통쾌한 퍼포먼스에 열광한다. "죽어도 싸지"라고 외치는 죄수들의 무대에 홀려 어느새 도덕적 판단을 잠시 내려놓는다. 현대의 관객 역시 철저하게 설계된 쇼의 일부가 된다.
이 풍경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다. 공정한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깊어질수록 대중은 사연 있는 악인의 서사에 더 깊이 빠져든다. 활자 신문은 SNS 피드가 됐고, 재판은 유튜브 콘텐츠가 됐으며, 흉악 범죄자는 조회수를 보장하는 셀러브리티가 됐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의 실제 주인공 애나 소로킨이다. 그는 사기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전자발찌를 찬 채 패션 화보를 촬영하며 여전히 유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범죄의 흔적이자 사회적 낙인이어야 할 전자발찌조차 패션 아이템처럼 소비된다.
결국 '시카고'가 던지는 질문의 종착지는 대중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보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고, 피해자의 눈물보다 가해자의 서사에 더 오래 시선을 빼앗기는 우리가 범죄자를 스타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가 브로드웨이에서 30년째 막을 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0년 전 시카고 법정의 쇼는 무대만 휴대폰 화면으로 옮겨졌을 뿐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범죄를 캐릭터로 소비하고, 가해자의 스타성에 현혹되는 우리는 이 쇼의 관객일 뿐일까. 아니면 쇼를 끝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출연자인 걸까.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 신중히 행동하길"… 중국, 한미·미일 확장억제 협의에 반발-국제ㅣ한국일보
- '잠실 충돌현장, 대학생 의식불명'... 이 가짜뉴스로 유튜버가 벌어들인 돈은?-사회ㅣ한국일보
- '응사' 민도희 "지난 1년간 카페 알바… 일 없어서 위축" 근황-문화ㅣ한국일보
- 재활용 센터서 나온 사람 다리, 요양병원서 절단 수술받은 환자 다리였다-사회ㅣ한국일보
- 마중 나온 정청래 90도 허리 숙였다... 이 대통령 "수고했습니다"-정치ㅣ한국일보
- 성과급 듣자마자 '마흔 전 1억 기부' 실천한 직원…"하이닉스 다닌 건 행운"-사회ㅣ한국일보
- 한동훈, 지역 주민들에 "장동혁? 좀 이따 물러나요"… 국힘 복당 '잰걸음'-정치ㅣ한국일보
- '올해 70세' 심수봉 "소리 못 듣는 희귀병 앓고 있어" 심경 토로-문화ㅣ한국일보
- 서울 한복판 깎아지른 절벽… 그곳의 아픈 역사를 아시나요-라이프ㅣ한국일보
- 아나운서 출신 황현주 "전 남편이 계단서 밀쳐… " 가정폭력 피해 고백-문화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