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소리 나지 않아도 들리는 피아노
들리지 않는 피아노를 아시나요?
선율이 들리지 않는 피아노가 무대에 올랐다. 미디어 아트와 창작 음악의 만남을 주제로 하는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이었다. 시각 예술가 정연두와 작곡가 임지선은 지난해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에 이어서 올해 서울 북촌에서 열린 이 페스티벌에서도 ‘싱코페이션 #5’라는 협업 작품을 선보였다.
무대엔 피아노 두 대가 등장했다. 그중 한 대는 아무리 건반을 눌러도 아무런 선율이 들리지 않는 무율(無律) 피아노였다. 피아노 내부의 현(絃)을 일일이 펠트로 감싸서 음정과 화성을 모두 지운 이 악기는 맞은편 유율 피아노와 조응하면서 색다른 앙상블을 엮어냈다. 신기하게도 악보엔 음정과 화성이 온전히 적혀 있었다. 무율 피아노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정다현은 일반 피아노로 연습한 뒤, 공연 당일에야 무율 피아노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선율이 들리진 않아도 머릿속에선 한가득 울리고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이 유달리 마음에 와닿았다. 발성되지 않는 묵음(默音)이 오히려 풍성하게 공명할 수 있다는 음악적 역설이었다.
정연두와 임지선은 이 작품을 위해 8개월 동안 치열하게 협업했다고 한다. 공연 뒤 이어진 아티스트 토크에서 나는 예술가들의 꿈과 뜻을 끌어내는 대담자 역할을 맡았다. 정연두 작가는 두 대의 피아노를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존재들의 대화”라 설명했다.
이 생경한 조합은 단순한 음향적 실험으로 그치지 않았다. 작품 곳곳엔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병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됐던 고려인들의 망향가(望鄕歌)가 새겨져 있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서로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함께 살아야 했던 사람들처럼, 한 피아노는 선율로 말하고 다른 피아노는 묵음으로 답하며 공존의 음악을 이루었다.
정연두 작가가 작업한 영상의 배경은 강원도였다. 양간지풍(襄杆之風)의 산불로 황폐해진 대지 위에 어린 묘목이 다시 자라고, 사람들은 모내기와 추수를 거쳐서 신성한 술을 빚는다. 특히 강릉 단오제 신주(神酒) 빚기 장면은 음악과 절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정 작가는 음악을 “만 번쯤 들었다”고 했다. 분초 단위로 악상의 의미를 도출하고 음표 하나하나마다 영상의 타이밍을 맞췄을 집요함이 화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공연 내내 바람과 물결, 횃불이 모두 소리로 들리는 듯했다. 인간의 염원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이 유율과 무율 피아노처럼 한데 어우러졌다. 들리는 소리만큼 들리지 않는 묵음에도 귀 기울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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