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주얼리 ‘불가리’와 ‘미술계 올림픽’의 만남… “작가의 자유를 지지하는 것, 유산 복원만큼이나 중요”
베니스 비엔날레 131년 역사상 첫 독점 후원

지난달 6일(현지 시각) ‘미술계 올림픽’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가 대중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기 사흘 전. 이미 베니스는 각국을 대표하는 예술 작가들의 작품 향연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자 간담회 등을 시작으로 프레스 프리뷰 등 사전 행사를 통해 실질적인 공식 행사의 깃발을 올렸기 때문이다. 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비엔날레에 대한 관심은 빗줄기보다 강했다. 피콜로 극장(Teatro Piccolo Arsenale)에서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진행된 공식 기자 간담회에는 현지·외신 기자가 몰려 250석을 메우고도 서서 보는 이가 생길 정도였다.

◇불가리, 비엔날레 131년 역사상 처음으로 독점 후원
이날은 여느 때와는 달리 특별 연사가 연단에 나섰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의 장 크리스토프 바뱅 CEO였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1895년 창설된 이래 131년 만에 처음으로 불가리와 ‘독점 파트너(Exclusive Partner)’로 손잡은 것을 전 세계에 다시금 알리는 자리였다. 2년마다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두고 불가리는 올해를 비롯해 2028년과 2030년, 세 번의 회기(回期)를 아우르며 독점 파트너로 나선다. 단일 후원 모델로는 비엔날레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이다.


럭셔리 브랜드가 예술 후원을 하는 건 낯선 장면은 아니다. 현대미술재단 등 각종 예술 관련 재단을 소유하고 있거나 미술·공예·음악·무용·건축 등 예술 분야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예술가 양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유력 예술가와 손잡고 협업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요즘엔 일상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비엔날레는 다르다. ‘예술 올림픽’이라는 명칭답게 전 세계 100여 국가가 ‘국가관’을 두고, 자신의 예술 철학과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 각 국가관마다 저마다 브랜드 후원을 받는 경우가 있긴 해도 유구한 세월의 비엔날레가 단일 브랜드와 손잡고, 브랜드관까지 들어서는 건 예술과 상업성의 충돌이라는 우려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지 반응은 달랐다. 불가리가 1884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브랜드로, ‘이탈리아성’을 지니고 있는 데다 그간 베니스 두칼레 궁전의 황금 계단, 로마의 스페인 계단을 비롯해 카라칼라 욕탕, 토를로니아 컬렉션의 조각상 복원 등을 지원하며 예술 후원자를 자처해왔기 때문이다. 2024년부터는 유적을 보존하고 현대 예술을 지원하는 자선·문화 단체 ‘불가리 폰다지오네(불가리 재단)’를 설립해 문화를 살아 숨 쉬는 유산으로 지켜내겠다는 약속을 현실화하고 있다.
영국 매체 더 주얼리 에디터는 “전통적 스폰서가 개별 행사·전시관·문화유산 복원에 머물렀다면, 불가리는 이제 비엔날레 내부에 스스로를 ‘심어 놓는다(embedding)’”면서 “비엔날레와 함께 살아 숨 쉬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커미션, 전시 기획, 기관 협력이 한 회기에 그치지 않고 여러 회기에 걸쳐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후원의 문법을 바꾸는 행보라는 진단이다. 바뱅 CEO는 기자 간담회장에서 “많은 일을 인공지능이 할 수 있게 됐지만, 예술만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면서 “예술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 표현”이라고 강조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영국 소더비 매거진은 후원의 성격을 더 명확히 규정했다. “비엔날레의 문화 자본을 한 시즌 빌려 쓰는 후원이 아니라, 비엔날레의 장기 생태계에 대한 약속(commitment to its long-term ecology)이다.” 오는 7월부터 불가리 재단 회장이 되는 바뱅 CEO의 뒤를 이어 CEO 자리에 오를 라우라 부르데세가 영국을 대표하는 유력 예술 전문지 아트 뉴스페이퍼와 가진 인터뷰는 불가리의 의지를 강하게 설파한다. “유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으로 문화를 믿는다면, 그 미래도 함께 믿어야 한다. 살아있는 작가들과 자유로운 표현을 지지하는 것은 기념물을 복원하는 일만큼이나 본질적이다.”

◇한국적 모티프, 디아스포라의 사유로 번역되다
빛이 바뀔 때마다 35㎜ 필름도 함께 색을 바꾼다. 언젠가는 하얗게 ‘수렴’하고 ‘소멸’될 색상들. 이탈리아 베니스 기르디니에 새로 들어선 ‘불가리관’ 내부 전체에 옷감 널어놓듯 겹겹이 드리워진 필름은 비엔날레가 열리는 동안 색이 바래고 변해간다. 마치 우리의 존재처럼, 살아있는 생명체 같이 빛과 공기에 반응해 소멸해 가는 것.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로터스 L. 강(Lotus L. Kang·40)의 작품 ‘The Face of Desire is Loss(욕망의 얼굴은 상실)’이다. 조각·설치·사진의 교차점에 있는 작가가 ‘피부(스킨·skins)’라 부르는 이 필름들은 구멍이 숭숭 뚫려 마치 연근(蓮根) 같은 형상을 본뜬 철제 구조물에서 늘어뜨려져 있다. 오는 11월 22일까지 열릴 베니스 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브랜드관’으로 들어선 불가리관에 ‘영원한 기념비’ 대신 끊임없이 변형되는 작품을 택한 것이다.
필름에 새겨진 이미지는 한국 전라도 갯벌의 풍경과, 새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시각화한 스펙트로그램이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전이지대의 갯벌은, 삶과 죽음·생성과 소멸 사이의 경계를 다루는 작가의 주제의식과 정확히 포개진다.
필름이 생명과 맞닿아있다는 개념도 새로웠지만, 관객의 또다른 눈길을 끈 대목은 사방의 창문쪽 밑바닥 가장자리에 놓인 49개의 술병이다. 소주·맥주 병등이 ‘생명수’라는 이름으로 은유됐다. 현장에 있던 캐나다 미술관 큐레이터 관계자는 “윤회 직전 영혼이 49일간 머무는 상태에 바치는 헌사”이며, “작가의 원천인 한국 제사 의례에서 따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터스 강은 어린 시절 할머니의 집에서 영감을 받은 배춧잎, 물고기 등의 석고 캐스팅을 비롯해, 산업용 고무와 타프로 감싼 다다미, 알루미늄 주물 작업 등을 더해 파빌리온 전체를 빛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나의 ‘투사 장치’로 만들었다. 로터스 강 작가는 2024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빛에 민감한 필름을 ‘태닝(tanned)’해 늘어뜨린 ‘In Cascades’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온타리오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최근 국내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선보이면서 국내 열성팬을 만들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미국과 일본 기자들은 “흔히 무언가를 찍어내고 재생하는 중간 도구로 알려진 필름을 마치 생명을 가진 도구처럼 그에 ‘삶’을 부여해 필름이 투사하는 색상으로 인간이 빛과 각종 오염 물질 등에 노출돼 있는 모습을 그려낸 심도 깊은 작품”이라 입을 모았다.
이탈리아 현지 매체들은 불가리의 입성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문화재 복원부터 현대 미술 후원까지 다양하게 해왔던 역할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유력 미술 전문 매체 ‘일 조르날레 델라르테’(Il Giornale dell’Arte)는 “로터스 강 프로젝트를 통해 불가리가 아름다움의 창조자(creatrice di bellezza)이자 예술 언어의 촉진자라는 인식을 강화한다”고 전했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통상 협업하던 유명 작가들이나 각종 논란의 중심이 되는 화제성 있는 작가를 택해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것보다는 전도유망한 작가의 작품으로 조용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이탈리아 대표 매체 라 레푸블리카도 “로터스 강의 선택은 브랜드의 명성을 과시하기보다는 현대 미술 지원을 어떻게 진지하게 제도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했다.
해외 매체들의 반응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영국 하퍼스 바자는 “로터스 강의 전시를 가장 드라마틱했던 비엔날레 중 하나에서 놓쳐선 안 될 11개 전시 중 하나”로 꼽았고, 미국 소더비 매거진은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작가가 아니라 후원자(불가리)로부터 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유가 창조한다(Freedom Creates)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에서 선보인 작품은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의 거장 티치아노의 천장 프레스코화와 이탈리아 고전주의 화가인 도메니코 잠피에리가 도서관 내부 장식을 위해 그린 유명한 회화 작품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가 펼쳐졌다.
라라 파바레토의 ‘Momentary Monument - The Library(순간의 기념비-도서관)’와 모니아 벤 하무다의 ‘Fragments of Fire Worship(불의 신앙의 파편)’ 두 작품. 지식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롭게 해석되며 때로는 잊히기도 하는 성격을 지닌 공간에서, 두 작가의 설치 작업은 이곳을 기억과 지식이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보여준다.
2004~2005년 ‘이탈리아 젊은 미술상’ 수상 작가이자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여러 차례 참여한 중진 작가 라라 파바레토는 ‘순간의 기념비-도서관’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국립 대학 및 기관, 아카데미, 개인 컬렉션의 도서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전개됐으며, 기증 도서는 조사와 선별 과정을 거쳐 전시 장치로 설계된 거대한 서가에 배치됐으며, 각 책은 1995년부터 이어온 작가의 개인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서로 다른 이미지와 짝을 이룬다. 이러한 결합은 어긋남과 긴장, 공명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우연성을 기반으로 한 아날로그적 하이퍼텍스트(hypertext·책과 이미지가 서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를 구성한다. 관객은 책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고, 그래서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어 간다. 파바레토 작가는 제도와 공간 모두와 상호작용하며 디지털 시대의 지식 개념을 재고하고, 접근성과 경험, 기억과 분산, 가시성과 공동 책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의 출판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튀니지 이탈리아계 작가 모니아 벤 하무다의 ‘불의 신앙의 파편’은 전시 입구 공간인 베스티볼로(Vestibolo)에 설치된 두 점의 네온 조각으로 구성된 설치 작업이다. 로마 국립21세기미술관(MAXXI)과 불가리가 협력해 2년마다 선보이는 ‘막시 불가리 프라이즈’ 2024년 수상자이기도 한 작가는 이슬람 서예가의 딸인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글자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불가능한 알파벳’을 제시한다. 네온 빛은 불을 환기시키며, 불이 지닌 드러냄과 파괴라는 이중적 성격을 함께 보여준다. 단편적이고 해독 불가능한 빛의 기호들은 소통의 기능을 내려놓고 제스처이자 상처의 자국처럼 의미 없이 남겨진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지식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지닌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형식적 규범에 대한 일종의 ‘불복종’을 통해 언어가 지식을 하나의 방식으로만 전달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미국 보그는 “‘지식’이라 이름 붙은 티치아노의 천장화 아래에서, 학습이 어떻게 조작·부정·통제되어 왔는지를 영민하게 사유하는 작업”이라 평했다.
마르차나 도서관(역사) 설치 작품과 불가리관(동시대) 작품을 한 호흡으로 읽어낼 때 더 시너지를 발휘한다. 진귀한 보석이란 ‘시간을 견디는 것’이라는 불가리의 자기 정체성과 ‘Freedom Creates(자유가 창조한다)’는 이번 모토 하에, 언젠간 색상이 소멸될 필름 작품(강)과 영구적 도서관(파바레토·벤 하무다)의 대비로 풀어낸 구성은 그 자체로 정교한 큐레이팅이다.
이탈리아 매체 ‘nss 매거진’은 “브랜드 제품과 분리된 ‘재단’을 통한 후원이 소비자에게 ‘사심 없는(disinterested)’ 것으로 지각되며 바로 그 점에서 진정성을 획득한다”면서 “제품에서 거리를 두는 ‘자기초월’이 오히려 브랜드와 가치 있는 경험 사이의 순수한 관계성을 만들어낸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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