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화 앞에 가부좌 튼 스팽글 불상…시공간 꿰어 ‘진주’가 반짝

작가 35명의 작품 148점 ‘비엔날레급’
진주성·옛 차량정비고·이성자미술관
각 공간과 작품 어우러져 새로운 의미
인구 30만인데 채색화전 20만명 관람
국립현대미술관 진주 분관 유치 꿈도
인구 30만여명의 중소도시 경남 진주시. 흔히 논개와 진주성, 공군 정도를 떠올릴 법하지만 최근 미술 전시로도 눈길을 끌고 있다. 2022년부터 3회에 걸쳐 선보인 ‘한국 채색화의 흐름’은 누적 관람객 20만명을 기록하며 지역 너머에서도 주목받았다.
지난 15일 개막한 ‘이미지의 미래들-서사하는 기억, 채색화를 넘어’는 이러한 성과를 현대미술로 확장하는 시도다. 김기라 작가가 예술감독을 맡아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 국립진주박물관 등 진주 시내 3곳의 문화 공간을 연계해 ‘비엔날레급’ 전시를 꾸렸다. 이강소·신학철·김윤신·심문섭 등 원로 작가부터 이수경·권오상·정연두 등 중견 작가, 이우성·장종완 등 1980년대생 젊은 작가까지 35명의 작품 148점을 한데 모았다.

광역자치단체도 아닌 기초자치단체에서 이러한 대규모 전시를 꾸민 데는 진주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유치하려는 사정도 있다. 진주성에 있는 박물관은 옛 진주역 철도부지(현 철도문화공원)로 옮기고, 김수근이 설계한 기존 박물관을 국립현대미술관 진주관으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원도심과 진주성, 이성자미술관을 현대미술의 무대로 다시 배치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신작이 나온 것도 아니고, 동시대 첨단의 주제를 다루지도 않는다. 대신 작품들이 각각의 공간과 맞물리고, 서로 호응하도록 배치되면서 새로운 의미와 맥락이 만들어졌다. 지역의 장소성을 작품을 읽는 단서로 삼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전시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철도문화공원의 ‘광장의 기억’에서는 노동의 궤적이 새겨진 근대산업유산인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를 무대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사회적 발언을 주도해온 작가들과 동시대를 바라보는 중견·젊은 작가 18명의 시선을 엮어낸다. 이는 신학철, 서용선, 이우성의 작업이 나란히 놓인 공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붉은 벽돌과 목조 트러스가 노출된 정비고 안쪽에서 한국의 대표적 민중미술 화가 신학철의 ‘비상탈출’ 속 인물이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듯한 기세로 시선을 붙든다.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사실주의적 회화로 기록해온 그의 작품 맞은편에, 강렬한 색채와 거친 선으로 인간의 실존을 나타낸 서용선의 회화가 자리한다. ‘기총소사’ ‘젊은 죽음들’ 등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작품들 옆에서 나이 든 남성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하는 듯한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걸개그림’처럼 전시장 한가운데 걸려 있는 이우성의 ‘해질녘 노을빛과 친구들’에 닿는다. 동시대 청년이 함께하는 연대의 풍경에서 과거를 넘어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광장’은 사회적 기억과 개인의 실존이 교차하고, 그 끝에서 공동체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옛 정비고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지닌 작품들을 하나의 서사로 꿰어내는 배경이 된다.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의 ‘내면의 풍경’에선 미술관의 주인공인 이성자(1918~2009)의 예술 세계로부터 타래를 풀어가듯 현대 작가 10명의 작품을 엮어냈다. 자연의 생명력과 물질성, 내면의 감각과 정신성 같은 키워드로 짝지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의미를 연결하고 확장한다. 심문섭과 김윤신은 나무·돌 등 근원적 재료의 물성과 자연의 생명력을 탐구해온 작가들이다. 심문섭의 목조각과 회화가 폐목의 시간성, 시간의 흐름이 축적된 붓질을 통해 자연을 명상적으로 드러낸다면, 김윤신의 목조각과 회화는 나무의 결을 살린 기하학적 형상과 강렬한 색채로 생명력이 솟구치는 장면을 만든다.
한데 묶어 생각해보지 않은 이강소와 백현진도 한 공간에서 만났는데, 둘이 묘하게 닮았다. 이강소가 오리와 사슴 같은 형상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특정한 대상으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불규칙한 동그라미가 반복되는 백현진의 ‘자살방지용 그림’ 역시 관람객이 보고 싶은 대로 해석을 열어둔다. 마주한 두 작가의 작업 사이를 오가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
국립진주박물관의 ‘시간의 중첩’은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가 13명의 작품이 도자기와 전통 회화, 불상과 서예 작품이 놓일 법한 진열장과 벽면에 들어섰다. 백자와 청자 대신 도자기 파편을 금박으로 이어 붙인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가 놓이고, 불상이 있을 듯한 자리에는 반짝이는 스팽글로 만든 노상균의 시퀸 불상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현대 채색화의 지평을 연 박생광(1904~1985)의 무속적 회화와 참여 작가 중 최연소인 이재석(1989년생)의 이색적 풍경화가 나란히 걸린 장면도 상징적이다. 과거의 유산이 동시대 작가를 거쳐 미래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전시는 채색화를 특정 장르로 한정하지 않고 기억과 장소, 이미지를 겹쳐 다시 칠해낸다. 진주라는 지역에서 동시대 미술의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전시는 8월25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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