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많이 가지만 다시 손이 가는 희한한 매력은 뭘까 [김윤지의 애살맞아 생긴 일]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시인 신동엽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려고 이 시를 썼으나 나는 이 구절을 겨우 수박에 비유하려 한다. 두껍고 무거운 껍데기는 가라, 달콤 시원한 알맹이만 남고.

수박을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는 법이라며 두드려보라는데, 수박 소리가 어때야 잘 익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통통, 퉁퉁, 텅텅. 옆에 서서 두드리는 아주머니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것저것 두드리다 하나를 골라 카트에 싣는다. 나도 따라 두드려보지만 어떤 수박이든 다 비슷비슷하게 들린다. 그냥 봐서 예쁜 걸로 고를까. 검색창을 켜서 수박 잘 고르는 법을 찾아본다. 줄무늬가 선명하고 배꼽이 작으면 좋다, 들었을 때 묵직해야 한다, 꼭지가 싱싱해야 한다. 조건이 세 개나 되니 이건 또 할 만하다 싶어 이 수박 저 수박 들었다 놓았다 하다 보니 어느새 제법 수박 감별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어느 게 더 나은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고르는 시늉만큼은 그럴듯하다. 한참 고민하다 어차피 잘라봐야 아는거지! 라는 결론을 내린다.

삼색 끈 안에 수박을 넣는 것도 처음이라 서툴다. 보기보다 미끄러운 수박의 대가리를 손바닥을 쫙 펼치고 잡아 마찰계수를 높인다. 끈을 고쳐잡고 수박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엉겁결에 끈 안으로 쏙 들어갔다. 끈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 늘어뜨리면 수박이 대롱대롱 매달린다.
계산을 끝내고 수박을 차 트렁크에 실으려다 집까지 가는 도중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수박에 금이 가는 상상을 한다. 안 되겠다. 수박의 자리는 내 옆 조수석이다. 마트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는 서너 개의 과속방지턱과 두 개의 로터리가 있다. 과속방지턱도 조심, 로터리에서는 오른손으로 수박의 배를 잡고 천천히 돌아서 엉금엉금 기어서 집으로 향한다.
차에서 내려 겨우 끼워넣은 삼색 끈이 무색하게 다시 품에 안고 현관문을 연다. 부엌에 내려놓으니 티셔츠에 살살 문질러 져 반질반질해진 수박이 눈에 띈다. 들고 오는 것도 일이라고 수박을 냉장고 옆에 모셔두고 물을 꺼내 마시고 휴식을 취한다.

통에 담은 수박은 냉장고 속 재료들을 이리저리 옮겨서 자리를 만든 후 당당하게 넣어둔다. 다음엔 싱크대에 수북하게 쌓인 초록 껍질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그리고 수박을 손질한다고 꼈던 안경을 벗어놓고 현관에 있는 음식물쓰레기 카드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간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다. 카드를 음식물쓰레기 투입구에 넣고 문을 연다. 다음 재빨리 비닐에 든 껍질을 우수수 쏟아내고 다시 재빠르게 문을 닫는다. 이제 집에 가서 손을 뽀득뽀득 씻고 싱크대를 정리하고 도마와 칼을 설거지하면 끝이 난다.
손을 씻고 설거지도 마쳤으니 드디어 냉장고 문을 열 자격이 생겼다. 아까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수박 통을 꺼낸다. 뚜껑을 열면 울퉁불퉁하게 잘린 사각형들이 오밀조밀 담겨있다. 썩 예쁘진 않지만 내가 한 것이니 봐줄 만하다. 한 조각 집어 한 입 베어 무니 차갑고 달다. 마트에서 보았던 그 두껍고 무거운 껍데기는 이미 없다. 낑낑대며 들고 온 것도, 10개가 넘는 동영상을 본 것도, 안경을 벗고 음식물쓰레기통 앞에서 재빨리 문을 닫은 것도 다 이 한 조각을 위해서였나 싶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