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많이 가지만 다시 손이 가는 희한한 매력은 뭘까 [김윤지의 애살맞아 생긴 일]

김윤지 하동군 근무 2026. 6. 18. 18:0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시인 신동엽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려고 이 시를 썼으나 나는 이 구절을 겨우 수박에 비유하려 한다. 두껍고 무거운 껍데기는 가라, 달콤 시원한 알맹이만 남고.

과일은 계절보다 반걸음 빠르다. 그래서 수박은 퍽 비싸긴 해도 5월부터 시작된다. 마트에서 한 통에 3만 원, 어림잡아 30만 원어치가 쌓여 있다. 수박 앞에 서면 늘 잠깐 망설이게 된다. 이게 맞나, 더 좋은 게 있지 않을까. 고르기도 전에 이미 피곤해지는 과일이다.
여름철 과일인 고르기도 쉽지 않다. 마트에서 신중하게 고른 수박 한 통. /김윤지

수박을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는 법이라며 두드려보라는데, 수박 소리가 어때야 잘 익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통통, 퉁퉁, 텅텅. 옆에 서서 두드리는 아주머니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것저것 두드리다 하나를 골라 카트에 싣는다. 나도 따라 두드려보지만 어떤 수박이든 다 비슷비슷하게 들린다. 그냥 봐서 예쁜 걸로 고를까. 검색창을 켜서 수박 잘 고르는 법을 찾아본다. 줄무늬가 선명하고 배꼽이 작으면 좋다, 들었을 때 묵직해야 한다, 꼭지가 싱싱해야 한다. 조건이 세 개나 되니 이건 또 할 만하다 싶어 이 수박 저 수박 들었다 놓았다 하다 보니 어느새 제법 수박 감별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어느 게 더 나은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고르는 시늉만큼은 그럴듯하다. 한참 고민하다 어차피 잘라봐야 아는거지! 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끝내 확신 없이 3만 원짜리 줄에서 하나를 집어든다. 그 옆의 거무스름한 3만 5000원짜리 수박과 잠시 눈이 마주친다. 두드려봐도 모르는 내가 5000원 더 내봐야 뭐가 달라지겠나 싶기도 하고, 비싼 게 더 좋다는 자본주의 섭리를 따르자니 왠지 지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뜻밖의 행운을 기대하며 5000원을 아끼기로 한다. 무엇을 골랐든 집에 가면 내가 책임져야 할 수박이다. 잘 익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카트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3만 원짜리 수박이 제발 맛있길, 괜히 아낀 5000원이 후회되지 않길 바라면서.
엄마가 잘랐던 기억을 떠올려 잘라 본 수박. /김윤지

삼색 끈 안에 수박을 넣는 것도 처음이라 서툴다. 보기보다 미끄러운 수박의 대가리를 손바닥을 쫙 펼치고 잡아 마찰계수를 높인다. 끈을 고쳐잡고 수박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엉겁결에 끈 안으로 쏙 들어갔다. 끈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 늘어뜨리면 수박이 대롱대롱 매달린다.

계산을 끝내고 수박을 차 트렁크에 실으려다 집까지 가는 도중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수박에 금이 가는 상상을 한다. 안 되겠다. 수박의 자리는 내 옆 조수석이다. 마트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는 서너 개의 과속방지턱과 두 개의 로터리가 있다. 과속방지턱도 조심, 로터리에서는 오른손으로 수박의 배를 잡고 천천히 돌아서 엉금엉금 기어서 집으로 향한다.

차에서 내려 겨우 끼워넣은 삼색 끈이 무색하게 다시 품에 안고 현관문을 연다. 부엌에 내려놓으니 티셔츠에 살살 문질러 져 반질반질해진 수박이 눈에 띈다. 들고 오는 것도 일이라고 수박을 냉장고 옆에 모셔두고 물을 꺼내 마시고 휴식을 취한다.

낮잠이라도 잘 요령으로 눈을 감고 있다가 저 수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중한 책임감에 눈을 뜬다. 검색창을 켜서 수박 자르는 법, 수박 보관법을 찾아본다. 다들 '쉽게 자르는 법'이라는데 그냥 동작이 빠른 것뿐, 하나도 안 쉬워 보인다. 하지만, 사온 내 수박은 내가 책임져야 하기에 다시 부엌으로 가 수박을 싱크대에 넣어두고 칼을 꺼낸다. 분명히 10개가 넘는 영상을 봤는데 모두 제각각 이라 결국 동영상은 접어두고 엄마가 어떻게 잘랐는지 기억을 반추해 세로로 자른다. 기다란 수박으로 잘랐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생각이 안 난다. 도마에 수박을 올리고 껍질을 도려낸다. 붉은 살이 아까워 살살 칼을 들이미는데 어림도 없다. 조금 더 두껍게 도려내어도 어림도 없다. 겨우 세 번 만에 붉은 속살이 나왔다. 아무 필요도 없는 껍질이 이렇게나 두껍다니, 집까지 낑낑대며 모셔온 일이 조금은 억울해진다. 이리저리 울퉁불퉁하게나마 껍질을 도려내고 엄마가 한 것보다는 어설프지만 나름 수박을 정사각형으로 잘라서 통에 담는다. 겨우 두 통에 담으니 끝이 난다.
수박을 잘라 냉장고가 넣어두니 든든하다. /김윤지

통에 담은 수박은 냉장고 속 재료들을 이리저리 옮겨서 자리를 만든 후 당당하게 넣어둔다. 다음엔 싱크대에 수북하게 쌓인 초록 껍질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그리고 수박을 손질한다고 꼈던 안경을 벗어놓고 현관에 있는 음식물쓰레기 카드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간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다. 카드를 음식물쓰레기 투입구에 넣고 문을 연다. 다음 재빨리 비닐에 든 껍질을 우수수 쏟아내고 다시 재빠르게 문을 닫는다. 이제 집에 가서 손을 뽀득뽀득 씻고 싱크대를 정리하고 도마와 칼을 설거지하면 끝이 난다.

손을 씻고 설거지도 마쳤으니 드디어 냉장고 문을 열 자격이 생겼다. 아까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수박 통을 꺼낸다. 뚜껑을 열면 울퉁불퉁하게 잘린 사각형들이 오밀조밀 담겨있다. 썩 예쁘진 않지만 내가 한 것이니 봐줄 만하다. 한 조각 집어 한 입 베어 무니 차갑고 달다. 마트에서 보았던 그 두껍고 무거운 껍데기는 이미 없다. 낑낑대며 들고 온 것도, 10개가 넘는 동영상을 본 것도, 안경을 벗고 음식물쓰레기통 앞에서 재빨리 문을 닫은 것도 다 이 한 조각을 위해서였나 싶다.

수박은 과즙이 많아 배가 금방 부르지만 또 금방 꺼진다. 손은 많이 가는데 막상 먹을 땐 그 고생이 생각나지 않는 희한한 과일이다. 그 덕에 내가 고생해서 만든 두 통 중 한 통은 나만큼이나 수박을 좋아하는 할머니 드리고, 나머지 한 통은 주말에 놀러 온다는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야지 싶었다. 그래서 수박은 사람을 미련하게 만드는 과일이다. 다음번에 수박을 사면 또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해야 한다. 두드려봐도 모르고, 영상을 봐도 잘 안 되고, 음식물쓰레기통 앞에서 또 잠깐 두려워할 것이다. 그래도 살 것이다. 여름이니까.
초록 껍데기만 남은 수박. /김윤지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는 남고. 가만히 있으면 껍데기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고 알맹이는 제자리에 남아있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반대다. 껍데기가 제 발로 걸어나갈 리 없고, 알맹이가 혼자 남을 리도 없다. 그러니까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는 어쩌면 그 모든 일을 해야 하는 나에게 스스로 하는 다짐이자,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나도 수박이 제 발로 우리 집 부엌에서 스스로 껍데기를 벗고 먹기 좋은 크기로 통에 들어가서 냉장고에 있는 제 자리에서 시원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