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치매 진단이 곧바로 자기결정권 상실은 아니다”…성년후견제도 대수술 논의 본격화
법원·학계·현장 “대리결정 넘어 의사결정지원이 작동할 인프라 필요”

초고령사회 진입 후 치매와 발달장애, 정신질환 등으로 의사결정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빠르게 늘고 있다. 하지만 2013년 도입된 성년후견제도는 당사자의 자기결정권 보장이라는 도입 취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신 결정하는 제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후견인을 통한 대리결정보다 당사자의 의사와 선호를 존중하는 지원체계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법·제도와 지역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7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린 '후견 등 의사결정지원기본법 심포지엄'에서는 성년후견제도 시행 13년을 맞아 제도의 성과와 한계를 점검하고 향후 개혁 방향을 논의했다. 심포지엄은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사단법인 온율, 아주대학교 사회적약자 법제도연구센터, 한국후견협회가 공동 주최했다.

개회식에서 윤세리 사단법인 온율 이사장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후견제도 본연의 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임의후견은 사실상 사문화됐고, 권리 제한이 가장 큰 성년후견만 압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성년후견제도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김예지 의원은 "후견이라는 용어 자체를 넘어 자기결정권 보장을 중심에 둔 의사결정지원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도 "후견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누군가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견 사건은 4배 늘었는데…임의후견은 40건
이날 심포지엄의 핵심 쟁점은 성년후견제도가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본래 취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첫 발표에 나선 배광열 변호사(사단법인 온율)는 '현행 후견제도 운영의 문제점'을 주제로 발표하며 후견제도가 이용자 중심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배 변호사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후견 관련 사건 접수는 2014년 2,605건에서 2024년 1만 1,571건으로 증가했다. 10년 만에 약 4.4배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유형별 현황을 보면 성년후견이 9,421건으로 전체의 82%를 차지했다. 반면 임의후견은 40건에 불과했다. 비율로는 0.3% 수준이다.
임의후견은 판단 능력이 충분할 때 본인이 미리 후견인을 정하고 향후 필요한 지원을 받도록 하는 제도다. 성년후견보다 자기결정권 존중 원칙에 더 부합하는 제도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강한 권한 제한을 수반하는 성년후견이 압도적으로 많고, 임의후견은 사실상 활용되지 않고 있다.
배 변호사는 "후견제도가 재산 관리 수단으로 주로 이용되면서 행위능력 제한이 가장 강한 성년후견 유형에 집중되고 있다"며 "후견인의 법정대리권을 제한하거나 당사자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결정권 보장, 후견 개혁의 출발점
배 변호사는 현행 후견제도의 가장 큰 문제로 여전히 '대리결정 중심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 제도가 피후견인의 의사보다 복리 판단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으며, 심판 과정에서도 본인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또한 후견 개시 이후에도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체계가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배 변호사는 "후견제도가 권리 보호를 위한 장치임에도 현실에서는 권리 제한의 측면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며 의사결정지원 관점에서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윤태영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 및 영국의 다층적 의사결정 지원체계 운영 동향으로부터의 시사점'을 주제로 발표하며 후견 중심 제도를 보완할 다층적 의사결정지원 체계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윤 교수는 미국의 지원된 의사결정(Supported Decision Making, SDM) 제도와 영국의 지속적 대리권(Lasting Power of Attorney, LPA), 독립 정신능력 옹호자(Independent Mental Capacity Advocate, IMCA) 제도 등을 소개하며 후견에 앞서 당사자의 의사와 선호를 확인하고 이를 실현하도록 돕는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논의는 치매 분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치매 진단이 곧바로 모든 의사결정 능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 치매나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는 본인이 일상생활, 돌봄 방식, 의료 결정, 재산 관리 등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치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곧바로 결정을 대신하는 제도가 아니라 남아 있는 판단 능력과 의사 표현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는 체계라는 점이 이번 논의의 핵심으로 제시됐다.
공공후견은 분절 운영…"통합 전달체계 필요"
공공후견 제도의 운영 방식도 개선 과제로 제시됐다. 현재 공공후견은 발달장애인, 정신질환자, 치매 환자, 보호대상아동 등 대상군별로 서로 다른 법률과 사업 체계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배 변호사는 이로 인해 후견인 모집과 교육, 관리 체계가 중복되고 예산과 인력도 분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역에 따라 후견인 후보자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업별로 별도 인력풀을 운영하는 방식은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후견인 후보자와 교육체계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지역 간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전달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중앙 지원기관과 지역 후견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한 통합 관리체계 구축, 후견인 인력풀 공유, 지원 대상 확대 등을 개선 방안으로 제시했다.
치매도 자기결정권 중요…토론서도 의사결정지원 강조
1부 토론에서는 후견제도 개혁의 방향으로 자기결정권 보장과 의사결정지원 체계 구축 필요성이 강조됐다.

문은정 중앙치매센터 변호사는 치매 공공후견사업 사례를 소개하며 치매 환자의 잔존 능력과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특정후견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중앙치매센터가 제5차 치매관리종합계획 연구 과제에서 검토 중인 '사전후견의향서' 도입 논의도 소개했다.
김형률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는 후견제도의 기본 이념은 원래 자기결정권 존중과 의사결정지원에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정신감정, 가사 조사, 지역사회 연계 체계 등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후견제도의 핵심 원칙으로 필요성 원칙과 보충성 원칙, 정상화 원칙을 소개하며 후견은 다른 지원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만 활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강원 법무법인 디엘지 공익인권센터 부센터장은 임의후견과 특정후견이 의사결정지원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며 대리결정을 최소화하고 지원 중심으로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후견청 또는 의사결정지원청과 같은 전담 조직 설치 필요성도 제기했다.
유보영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고령사회정책총괄과장은 의사결정지원 역시 연명의료결정제도처럼 사회적 논의를 거쳐 제도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도 개혁 중…"후견에서 의사결정지원으로"
2부에서는 일본 후생노동성 성년후견이용촉진실 참사관을 지낸 스다 토시유키 연구교수가 일본의 성년후견 이용 촉진 정책과 최근 개혁 동향을 소개했다.

스다 교수는 일본 역시 고령화와 치매 인구 증가 속에서 기존 성년후견제도가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운영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고 설명했다. 후견이 시작되면 사실상 평생 지속되는 구조, 이용자의 의사보다 재산관리와 법률행위 대리가 중심이 되는 운영 방식, 임의후견 활용 저조 등이 대표적인 문제로 지적됐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성년후견제도 이용촉진법과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후견을 필요한 범위에서만 활용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당사자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체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올해 발표된 민법 개정 요강에서는 후견 유형 단순화와 종료 제도 도입, 임의후견 활성화, 본인 의사 존중 원칙 강화 등이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이어 박인환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의사결정지원기본법안의 내용과 향후 과제'를 발표하며 한국 역시 성년후견제도 개편을 넘어 독립적인 의사결정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현행 제도가 후견 개시 여부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보니 판단 능력이 일부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충분한 지원보다 대리결정이 우선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이 강조하는 자기결정권과 의사·선호 존중 원칙을 국내 법체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사결정지원기본법을 통해 당사자의 의사와 선호 존중 원칙 명문화, 의사결정지원인의 법적 지위와 역할 규정, 공공 의사결정지원 전달체계 구축, 후견과 의사결정지원의 연계 체계 마련, 의사결정지원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규정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 교수는 "후견은 필요한 경우에 활용되는 최후의 안전망이어야 하며, 그 이전 단계에서 당사자가 자신의 삶에 관한 결정을 최대한 직접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2부 토론에서 한국후견협회 부회장 구상엽 변호사는 박 교수가 제안한 동의권 제도에 대해 "이용자층을 넓힐 수 있는 시도"라고 평가하면서도 법적 안정성과 공시 체계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요자 중심의 입법"이 중요하다며 제도가 선한 취지와 달리 이용자에게 불편한 제도로 설계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성년후견법률지원특별위원회 차형진 변호사는 건강·의료·재산 관리·대리인 지정 등에 관한 사전지시서와 공적 등록 체계의 연계 가능성을 제안했다. 그는 의사와 선호를 미리 남겨두는 민간 영역의 기록 체계가 향후 의사결정지원 제도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봤다.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김구열 검사는 지역사회 의사결정지원 체계 구축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정립, 법무부와 법원의 협력, 결격조항 정비, 지역 간 격차 해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토론자들은 성년후견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후견을 최후의 안전망으로 두고 그 이전 단계에서 자기결정권을 지원하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초고령사회와 치매 인구 증가 속에서 이날 심포지엄은 '누가 대신 결정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특히 치매 진단이 곧바로 자기결정권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 만큼 남아 있는 판단 능력과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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