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인물열전]사명대사 유정

임명진 2026. 6.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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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이 끌고 간 3775명, 승려가 데려왔다
하늘에서 바라본 사명대사 유적지 전경.

비석이 땀을 흘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7일 전이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기 17일 전이었다. 1919년 3·1운동 3일 전. 1945년 해방 3일 전, 1950년 6·25전쟁 2일 전. 130년 동안 기록된 것만 30여 차례다.

밀양시 무안면 삼강동. 부산과 대구 사이, 산이 들판을 껴안은 내륙 깊숙한 자리다. 홍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돌담 안으로 들어서면 비각이 나온다. 비각 안에 비석이 서 있다. 표충비(表忠碑)다. 높이 4m, 너비 1m, 두께 54.5cm. 몸체는 검은 대리석이다.

압도감이 먼저 왔다. 그다음에 반신반의가 왔다. 저 검은 돌이 정말 땀을 흘린다고.

민간에선 믿고 있다.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아직 살아 있다고.

밀양시 문화관광해설사 이애경은 "비석의 땀방울은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았다"고 했다. 오직 몸체에만 흘렀다. 그래서 신비함이 더해진다.

앞면에는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행장이 새겨져 있다. 뒷면과 옆면에는 스승 서산대사 휴정(1520~1604)과 기허대사 영규(미상~1592)의 사적이 적혀 있다. 셋의 이름을 새겼지만, 비석의 주인공은 사명대사다. 이 땅 무안면이 그의 고향이다.

표충비는 1742년(영조 1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 남붕선사가 세웠다. 그의 일생은 네 줄이면 족하다.

승려가 됐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칼을 들었다. 전란이 끝나자 협상장에 섰다. 포로 3775명을 데려왔다.

밀양 무안리 향나무와 표충비각. 향나무는 1742년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와 함께 심은 나무이다. 가지가 옆으로 퍼지도록 원줄기를 자르고 곁가지를 다듬어 녹색 양산을 펼친 것 같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명대사 유적지 추모의 광장에 있는 사명대사 동상


◇산으로 들어갔다

154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1월 17일), 사명대사는 밀양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응규, 아버지는 임수성, 어머니는 달성 서씨였다. 7세에 조부에게 '사략(史略)'을 배웠다. 중국 역사를 간추린 입문서였다. 13세에 황여헌에게 맹자를 배웠다. 황여헌은 명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 71세 노학자가 13세 소년을 가르쳤다.

소년은 14세에 책을 덮었다. 세속의 학문이 온갖 인연에 얽매어 있음을 탄식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1558년 15세 소년 응규는 그해 어머니를 잃었다. 이듬해 아버지마저 떠났다. 두 해 만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해 경북 김천 직지사로 들어갔다. 신묵화상의 제자가 됐다. 법명 유정. 훗날의 사명대사다. '사명(四溟)'은 그의 법호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불법을 깨우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의미다.

출가 3년 만에 봉은사 승과에 합격했다. 18세였다. 승과는 고려 때부터 내려온 승려 선발 시험이다. 조선은 억불 국가였다. 태종 때 폐지했다가 명종 때 문정왕후가 잠시 복구했다. 유정이 합격한 것은 그 복구된 지 10년 만이었다. 문정왕후가 1565년 죽자 그것마저 다시 폐지됐다.

합격한 뒤 전국의 명산에서 수련했다. 오대산, 금강산, 태백산을 돌았다. 선(禪)을 닦았다. 1575년, 32세.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만났다. 제자가 됐다. 스승 아래서 좌선 수행과 경전 공부, 두 갈래의 불교 공부를 두루 익혔다.
 
포로송환문서.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피로인(조선인 포로, 민간인)을 송환한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 원본은 밀양 표충사소장.
사명대사기념관 내부의 역사 모형. 사명대사(유정)가 일본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 회담을 나누는 장면을 재현.


◇승려가 막았다

유교를 지향하는 조선은 개국 이래 200여 년 동안 불교를 짓밟았다. 승려는 도성 안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그 나라에 왜군이 쳐들어왔다.

1592년 음력 4월(양력 5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가 의주로 도망쳤다. 그제야 그 나라가 승려를 불렀다. 서산대사 휴정이 팔도도총섭에 임명됐다. 격문이 내려졌다. 사명대사 유정이 강원도 건봉사에서 의승병을 일으켰다. 200여 명이었다. 얼마 안 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목탁 대신 칼과 창이었다. 짓밟히던 자들이 짓밟힌 땅을 지키러 나선 것이었다. 

1593년 음력 1월(양력 2월), 명나라 이여송 군과 합세해 평양성을 탈환했다. 음력 3월(양력 4월), 경기 수락산 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조선 조정이 사명대사에게 당상관 직을 내렸다. 선조실록에 적혔다. "(사명대사)유정에게는 특별히 당상관의 직을 제수하여 승려들의 마음을 분발시키되, 만약 승려들이 곳곳에서 적을 밴다면 이 또한 일조가 될 것이다."

1594년 음력 4월(양력 5월), 단신으로 울산 서생포 왜성에 들어갔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이었다. 가토가 먼저 물었다. "조선에 보물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유정이 답했다. "있소. 당신의 목이오." 가토는 더 묻지 않았다.
 
사명대사 유적지 기념관, 사명대사 초상화.


회담은 네 차례 이어졌다. 겉으론 강화 협상이었다. 속으로는 정보전이었다. 가토에게는 셈이 있었다. 라이벌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은 조선을 빼놓고 강화협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협정이 추진되면 권력의 추가 고니시로 기울 것이 뻔했다.

가토는 협상을 깨고 싶었다. 사명대사에게도 셈이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 몰래 무슨 거래를 하는지 알아야 했다.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정보가 흘렀다. 비밀 협정 내용이 드러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천자의 딸과 혼인한다. 조선 왕자 한 명을 왜국으로 보낸다. 조선 남부 4개 도를 왜국에 넘긴다.'

조선은 몰랐다. 동맹국 명나라가 조선 땅을 팔고 있었다.

한양으로 돌아와 선조에게 고했다. 선조와 대신들이 분노했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항의했다. 힘없는 나라의 외침이었다. 그런데 협상은 무산됐다. 조선 승려 하나가 국면을 뒤집은 것이다.

1597년 음력 7월(양력 8월),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정유재란이었다. 사명대사는 명나라 군과 합세해 울산 도산성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1598년 음력 11월(양력 1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왜군이 물러났다. 전쟁이 끝났다. 선무원종(宣武原從) 일등공신이 됐다.
 
사명대사 유적지 기념관 전경.
사명대사 유적지 추모의 광장에 있는 사명대사 동상.



◇3775명을 데려왔다

종전 6년이 지난 1604년 음력 6월 22일(양력 8월 6일), 일본으로 향했다. 공식 직함은 탐적사(探賊使), 적의 동태를 살피는 사절이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직접 협상하기를 꺼렸다. 사명대사를 앞세웠다. 동행자는 손문욱 한 사람뿐이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를 먼저 만났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 무역으로 먹고사는 섬이었다. 전쟁으로 무역이 끊겼다. 조선과의 관계 회복이 절실했다. 3개월을 대마도에서 머물며 협상 조건을 조율했다.

1605년 음력 1월(양력 2월), 교토 후시미성으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실권을 장악한 자였다. 1603년에 에도막부를 열었다.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했다. 명나라와의 무역 재개를 위해서였다.

회담장에서 이에야스는 일본을 봉황에, 조선을 닭의 무리에 비유했다. 사명대사가 받아쳤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예천(醴泉·단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했다. 지금 당신들이 사는 곳을 보니 오동나무도 예천도 없다. 당신이야말로 닭의 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협상 결과는 네 가지였다.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 통신사를 교환한다. 포로를 송환한다. 왕릉 도굴 범인을 인도한다.'

1605년 음력 5월(양력 6월), 귀국했다. 조선인 3775명이 따라왔다. 전쟁 중 끌려간 이들이었다. 도공이 많았다. 일본이 조선 도공을 대거 납치해 간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일을 한 줄로 적었다. "유정이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 남녀 3000여 명을 쇄환하였다." 한 줄이었다.

하지만 적국의 역사가 도쿠토미 소호는 다르게 썼다. "승려로서는 아까울 정도의 지혜와 용맹과 언변력을 구비하고 대담함에 있어서도 적수가 없는 자였다."

문화관광해설사 이애경은 "조정은 한 줄로 끝냈지만 그 한 줄 뒤에 3775명의 삶이 있었다"고 짚었다.

귀국 후 사명대사는 관직을 마다했다. 조정이 직책을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전쟁 중 불탄 사찰을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금강산 유점사, 해인사 등을 재건했다. 1610년 음력 8월 26일(양력 10월 4일), 67세,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눈을 감았다. 홍제암은 그가 직접 지은 암자였다. 임종 전 제자들을 불러 앉혔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진 이 몸은 이제 진여(眞如)의 세계로 돌아가련다." 마지막 말이었다.

조정이 내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였다. 자비로 세상을 꿰뚫고 널리 중생을 구제했다는 뜻이다. 외교관도 군인도 아닌 승려에게 나라가 빚진 이름이었다.

임명진기자·취재 도움=밀양시

사명대사 유적지 기념관, 사명대사가 남긴 시와 글이 전시돼 있다.
사명대사 법복.
사명대사 유적지 추모광장
사명대사 유적지 추모광장에 사명대사의 일대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사명대사 유적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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