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선 일하는 척"…직장인들 몰래 즐기는 월드컵 '스텔스 응원'

황의재 기자 2026. 6. 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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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응원 못 가지만 열정은 '여전'
스트리밍 플랫폼 온라인 접속자 폭발
화면 투명도 높이고 이어폰 몰래 관전
일부 기업, 휴게실 개방해 시청 허용도
지난 11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조별리그 체코와 1차전이 진행되던 때 회사에서 월드컵 보는 직장인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한 인스타그램 게시물. SNS 갈무리

"회사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경기를 챙겨 보지는 못하지만, 경기 시작 알람이 울리면 사무실 분위기부터 묘하게 달라집니다."

매주 주말 축구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직장인 박모(35)씨의 말이다.

박씨는 최근 일부 언론이 한산한 거리와 호프집 풍경을 근거로 "월드컵 열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이는 평일 낮 시간대에 경기가 열리는 이번 대회 특성을 간과한 분석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축구팬들의 관심과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응원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거리 응원이나 단체 관람 대신 업무 중 틈틈이 경기 상황을 확인하거나 메신저로 실시간 반응을 주고받는 이른바 '스텔스 응원'이 새로운 월드컵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응원 무대, 광장·호프집서 사무실·스마트폰으로 옮겨져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포털 문자중계와 실시간 알림을 확인하고, 쉬는 시간마다 경기 결과를 공유하는 모습이 일상이 됐다. 월드컵 열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응원의 무대가 광장과 호프집에서 사무실과 스마트폰 화면으로 옮겨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증명하듯 뉴미디어 플랫폼의 중계 트래픽은 폭발적이다.

이번 대회 중계권을 확보한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 네이버 '치지직(CHZZK)'의 경우, 지난 11일 오전 열린 조별리그 1차전 체코와의 경기에서 순간 최고 동시 접속자 수가 480만 명을 돌파했다.

한자리에 모여 응원하는 대신 각자의 스마트폰이나 PC 화면을 보며 실시간 채팅으로 소통하는 새로운 응원 문화가 형성된 셈이다.

낮 시간 경기 탓 지역 축구인들 차분한 분위기
지역 축구팬들의 분위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차분하다.

광주 남구축구협회 소속 생활체육 축구팀들에 따르면 한국이 체코를 꺾은 뒤 멕시코전을 이틀 앞둔 현재까지도 회원들이 참여하는 메신저 단체대화방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회원 대부분이 직장인인 탓에 한창 업무가 진행되는 낮 시간에는 경기를 챙겨보거나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 야간이나 주말에 경기가 열릴 때마다 이어지던 '단체 관람 호프집 섭외'나 '스코어 맞히기 내기' 같은 이벤트 공지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관심이 식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응원 방식이 달라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광주 남구의 한 생활체육 축구팀 감독은 "축구에 미친 회원들이라 마음은 이미 경기장에 가 있지만 오전 시간대라 다들 일하느라 단톡방에 글 하나 남길 여유가 없는 것 같다"며 "이번 2차전 경기도 아마 각자 알아서 몰래 응원전을 펼칠 것 같다"고 말했다.

"입 틀어막고 무음 환호"…직장인들의 스텔스 응원 요령
업무 전화와 결재 서류 사이에서 대놓고 축구를 즐길 수 없는 직장인들은 일터에서 들키지 않고 경기를 보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다.

가장 흔한 방법은 모니터 구석에 작은 중계창을 띄워놓는 'PIP(화면 속 화면) 모드'나 영상의 투명도를 높여 몰래 경기를 시청하는 것이다.

상사에게 화면이 노출되는 자리라면 무선 이어폰을 한쪽만 꽂고 라디오처럼 오디오 중계만 듣기도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탕비실을 오가며 포털 사이트 문자 중계를 새로고침하거나,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며 상황을 확인하기도 한다.

입사 8년차 직장인 김모(33)씨는 "1차전 때도 몰래 스코어를 확인하느라 진땀을 뺐다"며 "가장 두려운 건 우리 대표팀이 골을 넣었을 때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까 봐 입을 꾹 틀어막는 '무음 환호'를 연습하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틱톡 크리에이터 '일오팔'이 회사에서 몰래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는 직장인들을 따라 하는 모습을 담아 게시한 유머 콘텐츠. SNS 갈무리

대다수 직장인들 업무와 응원 사이에서 눈치 보기
이 같은 직장인들의 '웃픈 현실'을 고려해 색다른 응원 문화를 선택한 기업들도 눈에 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유연한 조직문화를 갖춘 일부 기업들이 휴게실에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축구 경기를 중계하고, 직원들이 함께 응원하는 모습을 담은 콘텐츠가 잇따라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업무 시간 중 직원들의 월드컵 경기 시청을 허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상당수 직장인들은 여전히 업무와 응원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번 멕시코전 역시 1차전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은 광장이나 주점에 모여 함성을 지르는 대신, 사무실 책상과 파티션 뒤에서 경기 상황을 틈틈이 확인하며 조용하지만 뜨거운 응원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직장인 배모(43)씨는 "각자 일터에서 숨죽여 지켜보는 스텔스 응원이 되겠지만 마음만은 모두 경기장에 있을 것"이라며 "대표팀이 시원하게 승리해 다가오는 주말 축구 동호회 모임에서 그간 억눌렸던 함성을 마음껏 터뜨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