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서 다시 만난 리극로…조선어학회가 지킨 것은 ‘겨레의 생존’ [강형원의 인사이트]
![평양 애국렬사릉에 잠든 리극로와 리만규의 묘. 조선어학회의 인물들은 언어 독립운동가였다. 남과 북이 지금까지 같은 언어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북 모두가 조선어학회가 만든 통일안을 뿌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강형원 촬영]](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17/ned/20260617110454727ooff.png)

2026년 4월, 나는 평양에 있었다.포토저널리스트로서 수십 년 동안 한반도의 역사를 기록해온 나에게 이번 방문은 각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취재는 ‘사진으로 보는 우리 문화유산(Visual History of Korea)’ 책 출간 이후 3년 넘는 협의 끝에 입국이 승인되었다.
목적은 우리 고구려와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독립 저널리즘 프로젝트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취재와 사진 작업에는 어떠한 편집 조건도 없었으며, 취재 비용은 물론 내 개인 부담이었다. 자본이나 권력의 지원 없이, 역사 유적지와 문화 현장에 대한 접근은 현지 주민들에게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연출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객관적인 취재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14일간의 취재를 위해 국경을 넘었을 때, 나는 하나의 역사적 공백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코로나19 이후 DPRK는 사실상 국경을 봉쇄해 왔다. 내가 알기로 나는 장기 봉쇄 이후 평양을 방문한 최초의 서방권 기자였다.
워싱턴에는 제38대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Gerald Ford)의 말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Anyone claiming to be an expert on North Korea is a liar.(워싱턴에서 북한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평양 거리를 걸으며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떠올렸다. 이 지역에 대한 세계의 이해는 생각보다 훨씬 제한적이다. 우리말과 영어를 모두 구사하며 한국의 동아시아 초대문명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평양을 직접 세 차례 취재한 기자는 흔치 않다. 그래서 나는 이념이나 정치적 수사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본 우리 역사와 문화의 진실된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평양 애국렬사릉에서 뜻밖의 이름들을 만났다. 국어학자 33인을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 몰아 검거·투옥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역 리극로와, 식민지 말기의 극심한 압력 속에서도 조선어를 지키려 했던 인물 리만규였다. 분단 이후 이념의 그늘 속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평양 애국렬사릉에 잠든 이극로(1893~1978). 리극로가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녹음한 조선어 음성자료는 당대 우리말 소리를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 유산이다. [강형원 촬영]](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17/ned/20260617110455293tbca.jpg)
겨레의 말글을 세운 총사령탑, 리극로
리극로는 단순한 국어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추진자였고, 근대 우리글 운동의 총사령탑이었으며,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언어 정책에 모두 깊은 흔적을 남긴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학 중 베를린 대학에 조선어 강좌를 열어 유럽에서 우리말을 가르친 선구자였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우리나라가 불법 지배당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문제를 국제 무대에 알렸으며, 1928년 파리에서는 조선어 음성을 음반으로 녹음했다. 오늘날 그 음성 자료는 당대 우리말 소리를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 유산이다.
리극로는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년 우리말의 통일과 보호를 위해 펴낸 표준어휘집),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 근대 우리말 규범의 핵심 사업을 이끌었다.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맞춤법, 표준어, 사전, 외래어 표기 체계의 골격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라는 가장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조선어학회 인물들이 조직력과 학문적 신념으로 세워낸 근대 지식 인프라였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동포를 포함해 약 8500만 명의 코리안(DPRK는 한국인이란 단어를 쓰지 않기에 영어를 그대로 씀)이 있다. 이들은 한국말, 조선말, 한글, 조선글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같은 언어문화권 안에서 살아간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라 부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글”이라 부르지만, 그 문자의 뿌리는 하나다.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이고, 근대에 들어 그 문자를 현대적 어문 규범으로 다듬어낸 사람들은 조선어학회 인물들이었다.
일제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그래서 일어났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을 대거 검거했다. 리극로는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5년 광복으로 출옥했다.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삶만큼 강렬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흔치 않다.
그들의 묘소 앞에 서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오늘 우리가 아무런 불편 없이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현실은 과연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는가? 한반도의 언어가 분단 이후에도 큰 틀에서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이 있었다. 서로 다른 체제를 선택했지만 현대 어문 규범의 깊은 뿌리는 하나였고, 그 중심에 리극로가 있었다.
일제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강요하고 조선어 연구를 탄압했으며, 1940년에는 성과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언어와 이름을 빼앗아 겨레를 말살하려던 시대, 이에 맞서 민족의 정신적 뼈대를 세운 인물이 도산 안창호였다.
![평양 애국렬사릉에 잠든 리만규(1889 ~1978)는 식민지 말기의 극심한 압력 속에서도 조선어를 지키려 했던 조선어학회의 인물이다. [강형원 촬영]](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17/ned/20260617110455671nuig.jpg)
민주공화제의 초석을 놓고 사람을 기른 도산의 유산
도산의 업적은 독립운동을 넘어선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라는 근대적 정체성을 정립하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미국 리버사이드에 파차파 캠프를 세워 동포들을 결속시키는 등 민족의 자립 역량을 키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사상은 일제가 조작한 수양동우회 사건(1937)과 조선어학회 사건(1942)에 참여한 지식인과 교육자들에게 깊은 유산으로 이어졌다.
국어학자 이윤재 선생 역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에도 사전 편찬에 매진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1943년 감방에서 옥사했다.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한 문법이 아니라 도산이 강조했던 겨레의 정신과 민족 공동체의 미래였다.
그 중심에 리극로, 신명균, 이윤재, 최현배 같은 학자들이 있었다. 신명균 선생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기여했으나 일본식 성명 강요에 맞서 1940년 자결했고, 이윤재 선생은 “말과 글을 지키면 언젠가 되살아날 수 있다”며 사전 편찬에 전념하다 1943년 감옥에서 순국했다. 제 나라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은 독립국가 국민의 기본 자세이자 정체성을 지키는 근본이다.
2026년 봄, 평양 애국렬사릉에서 다시 생각했다. 조선어학회가 지킨 것은 단지 글자가 아니라 식민 권력이 지우려 했던 겨레의 기억과 역사, 정신이었다. 총과 칼만이 독립운동의 도구는 아니다. 사전도, 맞춤법도 모두 침략에 맞선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세종이 문자를 만들었다면, 리극로와 조선어학회는 그 문자가 격랑 속에서도 살아남아 쓰이도록 현대적 토대를 세운 사람들이다. 한반도가 80년 넘게 다른 체제 아래 살면서도 통역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선열들의 피와 땀 덕분이다.
나라를 잃었을 때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분단된 오늘, 그 말과 글을 함께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갈라진 역사를 다시 잇는 첫걸음이다. 평양에 묻힌 리극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는 저널리즘의 준엄한 책무다. 훈민정음은 가장 앞서간 글이었고, 리극로는 그 앞서간 글을 20세기의 세계 속에서 살아 있는 겨레의 문자로 지켜낸 사람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의 성명은 본인들이 생전에 썼던 리극로, 리만규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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