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달콤한 복숭아, 오페라 무대를 품다
셰프 찬사로 탄생 명품 디저트
동서양 설화 담은 신비의 과실
백도와 황도 저마다 풍미 달라
이천·음성 손꼽히는 대표산지

클래식 음악계에서 ‘넬리 멜바’라는 이름은 한국 대중에게 아주 친숙하지는 않다. 본명이 ‘헬렌 포터 미첼’인 이 호주 출신의 성악가는 우리나라 조수미처럼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디바(여성 스타 성악가)로 호주 100달러 지폐 모델이기도 하다.
1861년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난 그녀는 6살의 나이에 미국 리치먼드 국립극장에서 데뷔,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받았다. 1882년 결혼 직후 본격적인 성악가의 길을 걸었으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결혼 4년 만에 멜바는 유럽으로 건너가 성악 공부를 계속했다.
그녀는 188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주인공 질다 역으로 데뷔 무대를 치렀다. 본명 대신 멜바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소프라노 넬리 멜바의 명성은 전 유럽을 넘어 미국까지 퍼졌다. 그녀는 영국 왕실로부터 여성 기사 작위 ‘데임(Dame)’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로 수많은 이를 사로잡았다.
넬리 멜바의 열성팬이었던 셰프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그녀에게 헌정하는 요리를 만들기도 했다. 1892년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엘자 공주 역을 맡은 멜바는 당시 에스코피에가 근무하던 런던 사보이 호텔에 머물렀다. 첫 공연을 관람한 에스코피에는 감동을 복숭아 디저트로 빚어냈는데, 그 요리가 바로 ‘피치 멜바’다.
그는 얼음으로 백조를 조각하고 시럽에 조린 복숭아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뒤 솜사탕으로 덮어 장식했다. 백조의 기사와 사랑에 빠진 오페라 속 장면에서 착안한 이 디저트는 무대 위 멜바를 향한 헌사였다. 이후 에스코피에가 런던 칼튼 호텔 총괄 셰프가 되면서 피치 멜바는 정식 메뉴에 올랐고, 백조 장식이 사라진 대신 붉은 베리 시럽이 더해졌다.
여름 과일인 복숭아는 제철이 아닐 때도 먹을 수 있게 통조림으로 가공한다. 1970∼1980년대만 해도 시럽에 담근 복숭아 통조림은 병문안 선물로 사가는 고급 간식에 속했다. 하지만 가공한 통조림보다 달콤한 즙이 뚝뚝 떨어지는 제철복숭아를 베어 무는 쪽이 계절감을 만끽하기에 그만이다.
무릉도원에 복숭아나무가 우거지고, 신선이 먹는 과일 ‘반도(蟠桃)’ 역시 복숭아라고 전해질 정도로, 아시아권에선 복숭아를 상서로운 과일로 여겨왔다. 삼국지의 유비·관우·장비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의형제를 맺었고, 일본엔 커다란 복숭아에서 태어난 영웅 ‘모모타로’ 설화가 전해진다. 또 복숭아에는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여겨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금기도 있다.
동아시아에는 과육 색이 흰 백도가 많다. 백도는 황도에 비해 당도는 조금 부족하지만 은은한 향이 매력적이다. 흔히 과육 경도에 따라 ‘물복(물렁한 복숭아)’ ‘딱복(딱딱한 복숭아)’으로 취향이 갈리곤 하는데, 딱복은 며칠 보관하면 부드러운 물복이 되니 가족이 사온 복숭아가 딱복이라고 불평할 필요는 없다. 상대적으로 맛이 진한 황도는 고온 건조한 중동지역이 주산지다. 서구권에서 선호하며 피치 멜바의 재료로 쓰이는 종류도 황도다.
복숭아 특성상 운송이 까다로워 농사는 대도시와 접근성이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국내에선 경기 이천(장호원읍), 충북 음성(감곡면)·충주·옥천·영동, 세종시(조치원읍)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서로 이웃한 이천과 음성은 ‘햇사레 복숭아’라는 연합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수분을 머금은 복숭아는 갈증을 풀어주고 달콤한 향기로 기분을 좋게 만드는 여름의 선물 같은 존재다.

정세진 맛칼럼니스트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