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술이 산문이면, 뒤 술은 시(詩)다

한겨레 2026. 6. 1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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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29 술도가 ‘예술’ 정회철 (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술 속의 영특한 기운만 있으면/ 어디에 기대지 않아도 되네/ 가을 이슬처럼 둥글게 맺혀 밤이 되면 똑똑 떨어지네/ 청주의 늙으신 종사(오래된 좋은 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니/ 마치 하늘의 별과 같이 뽐내게 만드네/ …/ 반 잔 술 겨우 넘기자마자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니/ 표범 가죽 보료 위에 앉아 금으로 만든 병풍에 기댄 기분이네’

이색의 한시(1382) 한 대목, ‘목은시고’에 나온다. 제목은 ‘서린의 조판사가 가져온 아랄길(阿剌吉), 그 이름을 천길(天吉)이라고 했다’. 서린은 개성 근처 지명이고, 조판사는 고려말 문신 조운흘이다.(주영하 책 ‘조선의 미식가들’ 부분 인용)

가을 이슬처럼 맺혀 똑똑 떨어지는 것이 ‘소주’다. 술 한 모금에 훈기가 올라오니, 금병풍을 두른 옥좌가 부럽지 않다. ‘아랄길’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마음은 별처럼 반짝인다. 소주 딱 반 잔에 술이 시가 되었다.

‘삼국지’의 장비가 장판교에 나설 때 술을 항아리째 들이붓고, ‘수호전’의 노지심이 연달아 스무 사발을 들이켰다는 술은 소주가 아니고 조로 빚은 발효주다. 그때 소주라는 술이 없었거니와, 있다 하더라도 소주를 저렇게 마시면 곧 이승을 떠나게 된다.

소주(燒酒)는 물에서 불이 난다 해서 ‘불 술’이다. 고두밥에 누룩에, 물 붓고 기다려 빚은 술이 발효주다. 보통 13도, 포도를 으깨 가만두면 술이 되는 와인이 그렇다. 누대로 발효주를 마시다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 때 소주가 들어왔다. 소주의 시원은 아랍의 연금술이다. 몽골 칭기즈 칸이 페르시아 원정에서 증류 기술을 들여온다. 발효주에 불을 때면 그릇에 송골송골 맺히는 방울들, ‘땀’이라는 뜻의 아랍어 ‘아라크’다.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 병사의 허리춤에 호리병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그것을 마시자 갑자기 전투력이 상승했다는 술. 개성과 경북 안동소주, 제주 고소리술이 유명한 것은 몽골군 병참기지였기 때문이다. 이색의 시에 나오는 ‘아랄길’은 ‘아라크’의 음차다. ‘아라크’는 ‘알쿠흘’이 되었다가 ‘알코올’의 어원이 된다. 그러니까 저 페르시아의 ‘땀’이 동방으로 와서 ‘소주’가 되고, 서방으로 가서 포도주의 ‘땀’인 브랜디, 맥주의 ‘땀’인 위스키를 낳는다.

정회철(64) 대표가 강원도 홍천에 술도가 ‘전통예술’을 창업한 것이 2012년. 변호사 교수직 다 내려놓고 ‘법’에서 ‘술’로 인생 2막, 하고 싶은 일 하러 내려왔다. 홍천은 술이 유명한 동네다. 홍천 ‘백주’(白酒)는 평양 감홍로, 한산 소곡주, 여산 호산춘과 더불어 조선 4대 명주로 꼽히던 전통 탁주다. 그는 첫술로 탁주와 청주(약주)를 빚었다. 탁주는 ‘만강에 비친 달’과 ‘홍천강 탁주’, 청주는 ‘동몽’.

“술은 취하려고 먹는 게 아니고 맛있어서 마시는 겁니다. 우리 몸에는 우리 술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지요. 전통술은 그 성질이 우리 산하를 닮아서 온순하면서도 강직합니다. 주량껏 마셔도 숙취 없이 깨끗하고, 어느 선을 넘지 않아요. 기다림이 없는 막걸리, 주정을 희석한 소주, 맥주를 섞은 폭탄주, 술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우리 술 문화입니다. 폭탄은 폭주로, 폭언과 폭행으로 가기 쉽죠. 술 마시고 한마디로 떡이 되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 크지만 술의 책임도 있는 겁니다. 바른 술은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지요.”

사실 술처럼 그날그날 고생을 덜어주는 것도 없다. 들일을 마치고, 직장 하루 일 마치고, 해거름 참에 한잔 술은 고단한 심신을 풀어준다. 옛날 밀주처럼, 감미료 아스파탐 없이 누룩과 쌀로만 빚은 텁텁한 탁주 한 사발 하면, 이튿날 숙취 걱정도 없이 지금 식도 어디쯤 내려가고 있는지 찌릿 알려주는 전통 소주 한잔 나누면, 그만한 소소한 기쁨도 없다.

그러나 파는 식당도 드물고, 주머니는 얇다. 애주가가 전통술을 접하기 어려운 구조다. 서넛 조촐한 모임이나 회식에 우리 술 사 들고 가서 나눠 마시는 문화가 없다. 술집 이문도 생각하여 자리당 한병 정도는 양자 동의하에 즐길 수 있도록, 거대 양조회사만 배 불릴 일이 아니라, 전통 가양주 빚는 소규모 술도가에도 도움이 되도록, 그런 문화가 있으면 좋으련만.

‘동몽’(同夢)은 둘이 꾸는 같은 꿈이다. 정 대표는 찹쌀로 빚은 17도 청주 ‘동몽’을 출시했다. 술을 빚어 옹기에 150일 발효시킨 이양주로, 풍미가 좋다. 조선 명주 ‘호산춘’을 재현했다. 2018년 문재인 정부 때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됐다. 그해 9월14일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소할 때 ‘동몽’을 들고 남북이 건배했다.

이제 ‘소주’를 빚을 시간. 안동소주 진도홍주 하듯이 세상에 둘도 없는, 고도 소주는 술도가의 꿈이다. 정 대표는 2016년부터 매년 소주를 빚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술 ‘적선소주’(謫仙燒酒)를 모델로 삼았다. 인간계에 귀양 온 신선, 이백이 즐겨 마셨다는 술. 고문헌 여러곳에 ‘주방문’(酒方文)이 내려온다. 밑술은 멥쌀 죽으로, 덧술은 찹쌀밥으로 1차 발효주를 빚어, 두번 증류하여 2차 술, 소주를 얻는다. 정 대표는 원류 ‘적선소주’ 처방대로 아류 ‘무작53’을 빚었다. 쌀 누룩 물 외에 첨가물이 없다. 흐르는 대로 가는 것이지, 따로 짓지 않는다 해서 ‘무작’(無作)이다.

“고생고생해서 내놓았는데 잘 안 팔렸어요. 너무 실망해서 옹기에 넣어두고 3년을 방치했지요. 어느 날 뚜껑을 열어보니 향이 피어오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 다른 술이라, 옹기 숙성이 이런 효과를 낼지 전혀 몰랐어요. 서양과 달리 우리는 전통주 단절의 역사가 있잖습니까? 사람의 정성 뒤에 기다림의 시간을 놓치고 있었던 거지요. 모래와 흙 틈으로 미세하게 들락거리는 옹기의 호흡을 통해 술은 숙성되고 향은 응축되었던 신의 시간이죠. 5년이 지나니 깊고 그윽한 향이 올라와요.”

정 대표는 무릎을 쳤다. 스승은 문 앞까지 데려다줄 뿐, 문 열고 들어가는 일은 제자의 몫이라 하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면서, 여기까지 오는 데 15년 걸렸다고 했다.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CMB)은 30년 전통의 세계 최고 술 콩쿠르다. 와인과 증류주, 2개 부문을 블라인딩 심사한다. 지난해 ‘무작53’이 최고상 ‘그랑골드’를 수상했다. 출품 증류주 2500여종 가운데 2% 안에 들었다. 이로써 위스키, 코냑, 브랜디, 럼, 보드카, 진, 피스코, 그라파, 바이주, 테킬라 등 세계 증류주 대열에 우리 술은 맨 앞줄에 섰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한잔 아니 마실 수 없다. 5년 가둬 두었던 뚜껑이 열리면서 향이 빛살처럼 퍼진다. 53도 독주가 치받는 것 없이 넘어간다. 익숙한 향이다. 비 온 뒷날 아침 숲길 같은, 흙냄새 풀냄새 꽃향기, 누룩이 뿜는 촌 동네 냄새도 좀 난다. 맛은 묵직하고 깊다. 언젠가 지리산 암자에서 오미자차를 한잔 얻어 마셨을 때처럼, 자연이 빚은 야생의 맛이다. 주인장이 비교해 보라고, 중국 바이주 ‘수정방’을 따라 준다.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남의 집 잔치에는 ‘수정방’을 들고 가고, 우리 집 잔치에는 ‘무작’을 내놓겠다”고 나는 답례했다.

증류주 ‘무작53’ 1병(500㎖)이 나오려면 ‘동몽’ 같은 발효주 4병을 불 때서 응축해야 한다. 쌀은 한되가 넘는 약 2㎏, 한 사람 근 일주일치 식량이 들어간다. 발효주는 5개월 걸려 빚고, 그것을 증류하여 5년을 숙성해야 소주가 된다. 앞 술이 끙끙 앓아야 뒤 술이 되고, 그것은 또 긴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것을 보면, 앞 술은 산문 같고, 뒤 술은 시(詩) 같은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시는 모든 언어가 동경하는 상태’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이,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시가 되었을 때, 시는 언덕 높은 곳에 걸터앉아 있다. 곡식이 죽도 되고 밥도 되고 떡도 되지만, 이왕지사 한번은 술을 꿈꾸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걸쭉하게 들이켜는 탁주 한 사발이 붓 가는 대로 흐르는 산문이라면 목은이 마셨던 소주, 그리고 ‘무작53’에 이르면 시가 되었다고 하겠다.

‘법’과 ‘술’에 공통점이 있냐고 물었다. 헌법 일타강사 출신답게 술술 나온다. “헌법 9조에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나옵니다. 문화국가 원리예요. 쉽게 말하면 국가는 국민이 잘 먹고 잘 놀고 즐겁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가 사람을 고단한 노동으로부터 풀어주고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술의 성질과 다르지 않지요.”

‘무작53’, 상시로 가까이하고 싶으나 비싸다. 정 대표 말마따나 서민을 위한 ‘문화 원리’로부터, 술은 멀다. 그는 “이 대목 고민 중”이라면서, 두루 즐길 수 있도록, 값도 좀 덜해서 25도 소주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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