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초하(初夏)의 녹두관

녹두관을 찾은 것은 무명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기사로 접한 적이 있었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그 글을 읽고 무언가 죄스러운 감정이 솟아났다. 그것은 아마도 수많은 환란 속에 사라진 무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터였다. 이곳을 찾은 것도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컸다. 녹두관에 도착했을 때가 아홉 시쯤, 아직 개관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다. 다행히 관리자의 배려로 전시관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전시관은 조그마했다. 복도를 따라 빙 둘러보다가 마지막에 무명 동학 지도자 유해가 있는 안치실이 나타났다. 한가운데 커다란 사각의 빗돌이 놓여 있었다. 아주 오래된 고서 같은 빗돌 아래 그분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빗돌 앞에 섰다. 서늘한 공간이 엄숙함을 더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두 번의 깊은 절을 올렸다.
이 유골이 일본의 북해도에서 발견된 것은 1995년이었다. 유골에는 ‘한국 동학당 수괴‘라는 문구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골은 우리나라로 봉환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서 조사를 진행했으나 끝내 신원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유골을 수습한 곳이 전남 진도인 것만 밝혀졌다. 그 후 자리를 정하지 못한 채 20여 년이 흘렀다. 결국 이 녹두관에 안치되었다. 타국에 약 100년간 방치되었다가 고국을 찾은 뒤에도 또다시 20여 년간 방황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굴종의 역사와 모욕의 세월이 녹두관 좁은 공간에 짙게 배어 있었다.
서늘해진 마음으로 다시 시골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모내기를 앞둔 논에는 물이 방방하게 차 있었고, 온 산하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초록이 출렁이는 산등성이를 보자 까닭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땅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모든 영혼에 미안함이 솟구쳤다. 그들을 잊은 채 살아온 날들에 대한 뒤늦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마음은 어느새 깊은 산속 암자로 치닫고 있었다. 그 막막한 공간에서 용서를 화두 삼아 하염없이 목탁을 두드리며, 그들의 영면을 빌고 싶었다.
마음속 번뇌를 털어내듯 다음 날, 아침 일찍 유자밭으로 나갔다. 봄에 심은 유자나무 아래 벌써 잡초가 가득했다. 소루쟁이, 민들레, 환삼덩굴, 모시나무 등이 밭에 가득했다. 예초기를 돌리기에는 애매한 분량이었다. 천천히 낫질을 시작했다. 쓱쓱, 풀을 벨 때마다 코끝을 파고드는 풀 향기가 싱그러웠다. 낫질하며 혹 내 적성이 원래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때늦은 발견을 한 듯 기분이 좋았다. 어린 유자나무 아래 잡초를 뽑고 풀을 베어 나무 아래로 빙 둘러 깔았다. 벤 풀을 깔아 놓으면 그 아래는 잡초가 잘 자라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멀리 송냇가를 바라보았다. 산과 들 그리고 냇물이 모두 초록 물로 완전히 젖어 있었다.
오후에는 밭 구석에 있는 매화나무 작업을 했다. 옆 밭 주인이 나뭇가지가 자기네 밭으로 넘어와 유자나무 성장을 방해한다고 했다. 톱과 전지가위를 들고 매화나무 앞에 섰다. 가지를 자르고 잘린 가지에서 익은 매실을 땄다. 이미 많은 작고 설익은 매실들이 바닥에 이름 없이 떨어진 채였다. 녹두처럼 작은 매실들, 이제 주인마저 쓸모없다고 잘라버려 밑둥치만 남았다.
다시 서울 집으로 왔을 때 주문해 놓은 책이 도착해 있었다. 안삼환 교수의 장편소설 ‘역관 일지’였다. 소설 속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번역하는 노교수가 나오고, 녹두관의 무명 동학농민군이 유령으로 나타난다. 보이지 않고 사라질 뻔한 정신들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초여름의 녹음 속에서 내가 만난 것은 시대를 넘어 유유히 흐르는 삶의 알갱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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