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설마 우리 집은 아니겠지”…초고령사회 한국, 노인학대의 경고음

황교진 기자 2026. 6. 1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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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노인학대 7,973건…88.7%는 가정에서 발생
방문요양·요양원·요양병원 학대 잇따라…인권 보호와 돌봄 체계 개선 함께 가야
2025년 노인학대 사례의 88.7%는 가정에서 발생했다. 노인학대예방의 날을 맞아 안전한 돌봄과 노인 인권 보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챗지피티 생성

 

6월 15일은 노인학대예방의 날이다. 노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기념일로, 우리나라는 2015년 노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명시했다. 국제적으로는 2006년부터 6월 15일을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World Elder Abuse Awareness Day)'로 기념하며 노인학대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15일 노인학대예방의 날을 맞아 보건복지부와 전국 노인보호전문기관, 지방자치단체들은 기념식과 인식 개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기념행사에서는 노인인권 증진 유공자 포상과 노인학대 예방 퍼포먼스, 나비새김 캠페인 등이 이어지며 노인 존중 문화 확산과 학대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2024년 말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은 올해 치매 환자가 1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요양서비스 이용자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수명이 길어질수록 중요한 것은 안전하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노인학대는 여전히 우리 사회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가정은 물론 방문요양 현장과 요양시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노인학대, 폭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인학대는 흔히 폭행이나 폭언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범위는 훨씬 넓다. 노인복지법은 노인에게 신체적·정신적·성적·경제적 고통을 주거나 필요한 보호와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 행위를 노인학대로 규정한다. 신체적 학대와 정서적 학대, 성적 학대, 경제적 학대뿐 아니라 방임과 유기, 자기방임까지 포함된다.

신체적 학대는 폭행이나 신체 억제 등 물리적 손상을 가하는 행위이며, 정서적 학대는 욕설과 협박, 모욕, 고립 등을 통해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경우다. 경제적 학대는 재산을 빼앗거나 연금을 가로채는 행위, 방임은 적절한 돌봄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특히 치매 노인은 노인학대에 취약한 집단으로 꼽힌다. 학대를 당해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고,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력 저하나 의사소통 어려움 때문에 학대 사실이 장기간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인학대 대부분은 가정에서 발생

보건복지부가 노인학대예방의 날을 맞아 발표한 「2025 노인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전국 39개 지역노인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노인학대 신고는 2만 6,578건이었다. 이 가운데 7,973건이 실제 학대 사례로 판정됐다. 전년보다 신고 건수는 16.8%, 학대 사례는 11.2% 증가한 수치다.

학대 발생 장소는 가정이 88.7%로 가장 많았고, 생활시설이 7.7%, 이용시설이 1.1%를 차지했다. 가정 내 학대 사례는 7,076건으로 전년보다 11.9% 증가했다. 

피해자는 여성 노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학대 행위자는 배우자가 39.4%로 가장 많고 아들이 23.5%로 뒤를 이었다. 과거에는 자녀에 의한 학대가 주목받았지만 최근에는 배우자에 의한 학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노인부부 가구 증가와 함께 노인 간 돌봄 부담과 부양 스트레스가 배우자 학대 증가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노인학대가 낯선 타인보다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적 어려움과 돌봄 부담, 장기간의 간병 스트레스, 가족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학대로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방문요양·요양원·요양병원…돌봄 현장의 경고음

노인 돌봄의 상당 부분이 장기요양서비스로 이동하면서 학대 문제도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방문요양은 노인이 익숙한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제도다. 그러나 보호자가 없는 시간에 요양보호사와 노인이 단둘이 있는 경우가 많아 학대가 발생해도 발견이 늦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최근 TV 탐사보도를 통해 알려진 방문요양 학대 사건은 재가서비스의 사각지대를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영상에는 요양보호사가 치매 노인에게 폭언하거나 신체를 거칠게 다루는 모습이 담겼다. 피해 노인은 인지기능 저하로 인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알리기 어려운 상태였고, 가족이 설치한 영상기기를 통해서야 학대 정황이 드러났다. 이후 법원은 해당 요양보호사의 학대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일부 요양원에서는 노인을 침대나 휠체어에 장시간 묶어두는 부적절한 신체 억제 사례가 적발됐고, 방임이나 폭언 등 인권 침해 문제가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요양병원에서도 의료적 필요성과 무관한 과도한 신체 억제 사용이 논란이 된 사례가 있었다.

다만 이러한 사례가 전체 장기요양기관과 요양병원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는 많은 요양보호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돌봄 종사자들이 입소 노인의 안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인권 중심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은 노인학대를 개인의 일탈로만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적정 인력 확보와 종사자 교육, 근무환경 개선, 인권 보호 체계 강화 등 구조적 대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학대 예방의 핵심은 조기 발견

노인학대의 가장 큰 특징은 반복성과 은폐성이다. 아동학대와 마찬가지로 한 번 시작된 학대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경제적·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관계 단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고를 망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멍과 상처가 반복되거나, 갑작스러운 체중 감소, 지속적인 위축과 불안, 재산 관리 이상 징후, 의료서비스 미이용 등이 나타날 경우 학대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치매 환자의 경우 행동 변화나 불안 증상이 단순한 질환 증상으로 오해될 수 있어 가족과 종사자들의 세심한 관찰이 더욱 중요하다.

노인보호전문기관, 학대 대응의 최전선

노인학대 대응의 중심에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있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과 전국 39개 지역노인보호전문기관은 노인학대 신고 접수와 현장조사, 피해 노인 보호, 상담, 사례관리, 학대행위자 교육 등을 수행하고 있다. 전국 20개 학대피해노인 전용쉼터도 운영하며, 학대 재발 방지와 피해자 회복을 위한 지원 역할도 맡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매년 노인학대예방의 날을 맞아 인식 개선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인 '나비새김 캠페인'은 노인학대 신고전화 1577-1389를 알리고 노인 존중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전국 단위 홍보 활동이다.

'나비새김'은 학대에서 벗어나 존엄한 삶을 누리는 노인의 희망을 상징하는 나비와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과 신고전화 1577-1389를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캠페인은 신고번호가 새겨진 팔찌와 목걸이 형태의 인식표 보급, 인식 개선 교육, 홍보 활동 등을 통해 노인학대 예방과 조기 신고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인권 보호와 돌봄 노동 환경 개선, 함께 가야

노인학대를 이야기할 때 종종 간과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돌봄 노동자의 현실이다. 요양보호사와 돌봄 종사자들은 낮은 임금과 높은 업무 강도, 감정노동, 인력 부족 속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치매 환자의 돌발행동에 대응하거나 중증 노인을 장시간 돌보는 과정에서 육체적·정신적 소진을 경험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노인학대를 줄이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전문가들은 적정 인력 배치와 교육 강화, 종사자 심리 지원, 근무환경 개선, 돌봄 인력 확충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족 돌봄 부담을 줄이고 지역사회 돌봄 체계를 강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정부는 노인학대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신고의무자 직군 확대와 노인학대 신고앱 '나비새김' 활성화, 인공지능(AI)과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고위험군 상시 모니터링, 시설 학대 적발 기관에 대한 관리 강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노인보호전문기관과 학대 피해 노인 전용 쉼터 확충, 관련 종사자 처우 개선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초고령사회에서 노인의 존엄과 인권을 지키는 일은 돌봄 종사자가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노인학대예방의 날은 학대 사건의 처벌을 넘어, 안전한 돌봄과 존엄한 노후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노인학대 예방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 전체의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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