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 문어가 나타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포도밭으로 간다. 잠옷 바람에 맨발로 포도나무들 사이를 걸어간다. 마을 앞 적보산에서 금방 올라온 아침 햇살이 젖은 포도잎을 반짝거리게 한다. 포도나무가 싱그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새소리도 아침엔 더없이 맑다. 거위와 닭 소리도 힘차다. “참 좋구나, 포도밭 아침의 이 느낌.” 혼자서 벅차게 감탄한다.
평소 포도밭은 농부의 일터지만 이른 아침 이곳은 나의 정원이면서 산책로, 휴식처이다. 싱그럽고 풋풋한 포도밭의 아침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다. ‘밭이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도 있어요. 잔잔한 기쁨과 에너지를 얻어갈 수도 있는 곳이에요! 한번 와보실래요?’ 마침 모두에게 알릴 기회가 왔다.
충주문화관광재단 문화도시센터에서 ‘소소한 호강’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전시를 지원해준다고 해서 얼른 신청했다. “전시장은 포도밭이에요. 포도밭의 흙과 나무, 돌과 잡초, 지푸라기, 비와 바람, 새소리, 닭과 거위, 농부의 한숨 소리, 포도밭의 모든 것을 재료로 전시 작품을 만들어보는 거예요. 전시 제목은 ‘소리수집’ 어때요?” 충주 작가 세 명이 의기투합해서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거 제대로 될지 모르겠어요. 뭔가 잘 안 풀려요.” 전시 준비를 하면서 작가들의 고민이 깊어간다. 포도밭을 수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곳에 멈추었다 저곳에 멈추었다, 하늘을 보았다 땅을 보았다, 내려올 때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밭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전시하는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포도밭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초록이 너무나 강해 웬만한 짓을 해서는 표시도 나지 않는다. 작가가 원했던 의도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실내 전시는 준비된 공간에 완성된 작품을 잘 걸면 된다. 공원 같은 실외 전시도 작품이 돋보이도록 주변이 잘 정돈돼 있다. 그러나 포도밭은 작품만을 위해 공간을 내주지 않는다. 작품 스스로 밭에 깃들어 어울려야 한다.
“이걸 좀 써볼까 해요.” 첫 번째 전시 작가가 포도나무 가지치기한 덩굴을 가리킨다. “전 저기 버드나무 가지들을 써도 될까요? 이 두엄 더미도 흥미로워요.” 두 번째 작가가 이렇게 말한다. 수심에 가득 차서 포도밭을 어슬렁거리던 작가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뭔가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먼저 밭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일하는 농부도 보고 나무도 보고 땅도 보면서, 천천히 밭을 이해하고 나니까 갑자기 일이 풀리네요. 작품만 전시한다기보다 작품을 통해 밭의 소리들을 찾아내는 것이 즐거워요!” 가지치기한 포도나무 줄기로 바다를 만들고 낡은 지지대 대나무로 문어를 만든다. 휜 버드나무 가지는 공중에 떠도는 미생물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밭을 향한 작가들의 상상력이 끝없이 펼쳐진다.
‘소리수집’ 전시를 시작한 뒤 누군가가 포스터를 보고 전화를 걸어온다. “거기 포도밭에서 뭐 하는 거예요? 밭에서 소리수집은 어떻게 해요?” 왠지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사람들이 밭을 농작물을 수확하는 땅으로만 여기지 않는 작은 신호가 왔다고 할까. 밭은 맛있는 것도 나오지만 재미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곳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글·사진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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