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터는 0.3평 탑, 당신이 올해 본 네 번째 사람" [산불감시원의 하루]

남준식 기자 2026. 6. 15.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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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주지봉
산불감시탑을 향해 걸어가는 산불감시원 김이수씨. 원래 엉성했던 탑은 허물고 헬기로 자재를 날라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아 글쎄, 일주일 정도는 천국이었죠. 이런 천국이 또 있나 싶더라니까. 근데 멍하니 몇 달씩 있어 봐요. 지겨워서 미치는 거예요. 여기 주지봉은 산불감시원이 아무도 안 오려고 해요. 우울증 걸릴 것 같다고. 눈을 계속 돌려야 하는데 책은 못 보죠, 유튜브도 몇 번 보면 질려요. 그래서 오디오북에 가입해서 소설 들어요. 그거 없으면 못 견뎌요."

경북 문경 마성면을 굽어보는 주지봉(368m) 산불감시탑 안. 7년째 이곳에서 산불을 감시하는 김이수(65)씨가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위해 먼지 쌓인 접이식 의자를 펼치며 말한다.

"삼각점 설치하러 한 명, 건너편 철탑 잘 좀 봐달라고 한전 직원 한 명, 등산객 한 명, 그리고 기자님이 올해 네 번째네요."

0.3평 남짓의 감시탑 안 풍경은 조촐하다. 달력, 시계, 거울, 온도계, 7년 전 전임자가 두고 간 효자손이 전부다. 시간이 멈춘 세계, 아니 무의미한 세계에 온 걸까. 그런 착각 속에서도 햇볕의 기울기는 조금씩 달라져 시간의 경과를 가늠할 수 있었다.

삼면으로 트인 창문 밖으로 문경의 산하가 펼쳐진다. 북쪽의 문경새재와 남쪽의 고모산성이 꽁무니를 숨긴 채, 낙동강 지류인 조령천이 굽이친다. 조령천은 백두대간의 백화산(1,064m)에서 흘러나온 산줄기를 깎아 주지봉을 만들었다. 그래서 주지봉을 오르려면 두꺼비 등을 타듯 뒤로 돌아가야 한다.

마성면사무소 앞에서 바라본 주지봉. 주지봉 꼭대기에 있는 하얀 산불감시탑이 조령천에 앉은 백로를 닮았다.

탄광촌 아이

오전 8시 40분, 마성면사무소에서 김씨를 만났다. 영남 선비처럼 깨끗이 정리된 용모에 빨간색 산불감시원 조끼를 입은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을까. 전업일까, 부업일까. 일은 즐거울까, 지루할까. 감시탑에서 무엇을 할까. 놀까, 잘까, 혹은 아무것도 안 할까.

그는 배달 오토바이로 불리는 자주색 시티백을 탄다. 산불감시원이 되면서 사비로 오토바이를 샀다. 앞장서 달리는 그의 오토바이를 차를 타고 뒤따랐다. 오토바이는 축사와 묘지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더니 250m 중턱에서 멈췄다. 숲에 들자 사면에는 세월의 층을 이룬 낙엽이 수북하고, 하얀 껍질의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뤄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라니의 하얀 엉덩이가 저만치 달아났다. 고요한 숲에선 작은 움직임도 들키고 만다. 김씨는 이곳에 고라니 한 마리가 산다고 했다.

숲 사이 희미한 길은 김씨가 낸 길이다. 그래서 지도상의 등산로와 일치하지 않는다. 능선에 접어들자 그의 말대로 정상까지 딱 12분. 사다리를 타고 5m 높이 감시탑에 올랐다.

오전 8시 40분 면사무소에 모인 마성면 산불감시원. 이때가 지나면 한동안 묵언 수행을 해야 한다.

"저기 공장이 있는 데가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오정산이고,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있는 산이 단산, 태양광 있는 산은 봉명산인데 흑연이 많이 나왔어요. 흑연 알죠? 연필심. 주흘산 오른쪽으로 보이는 돌산이 포암산, 그 옆으로 평평한 능선이 대미산, 탑 뒤에 보이는 산은 6.25 격전지였던 어룡산. 저기 오정산 골짜기에 탄광이 많았어요. 장자광업소, 동성광업소, 오성광업소……."

그는 문경 토박이다. 문경은 탄광도시였다. 문경 사람 중에 석탄밥 먹지 않은 사람 없듯, 그 역시 탄가루를 먹고 컸다. 그는 동성초와 마성중을 나왔다. 당시 광산 때문에 동성초 학생 수는 1,300명이 넘었다. 그런 학교가 동네에 세 개 있었으니 작은 면面에 애들만 3,000명이었다.

"저기 공장 보여요? 철도 차량 만드는 데예요. 원래는 탄을 캐다가 놔두는 저탄장이었어요. 겨울에 바람이 드세서 마성중 등굣길에 탄가루가 엄청 날렸어요. 초등학교 때 친구 하나는 그 새까만 풍경을 그려서 입상을 했죠. 추상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잘 살렸다면서."

김씨의 아버지도 오정산 골짜기의 열 개 넘는 탄광 중에서 하나를 맡아 운영했다. 어린 김씨는 폭약과 도화선을 메고 '구루마'를 끌고 갱을 드나들며 아버지 일을 거들었다.

오토바이로 타고 주지봉으로 향하는 김씨. 면사무소에서 주지봉 들머리까지 15분 정도 걸린다.

"사끼야마(막장에서 탄을 캐는 숙련공을 이르는 일본어)들이 폭약을 설치하고 도화선을 잘라 불붙이는데, 보통 담뱃불로 하거든. 근데 장에서 물이 쏟아지면 불이 잘 안 붙어요. 이미 타고 있는 도화선이 있는데, 다음 도화선에 불붙지 않으면 불안해 죽어요. 터지기 전에 빨리 나와야 하니까. 갱을 받치는 나무를 '동발'이라 하는데, 이게 무게를 받아 금이 가서 무너져 죽는 꿈을 어릴 때 많이 꿨어요. 지금은 전깃줄 수백 미터 뽑아서 1초 만에 발파하니까 안전하죠."

세월이 흘러 산불감시원이 된 그는 면에서 요청한 멧돼지 서식지 조사를 위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탄광을 찾았다. 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폐에 석탄가루나 먼지가 쌓이는 진폐증으로 돌아가셨다.

탄광촌 아이들의 놀이는 위태로웠다. 딱총놀이를 했는데, 진짜 총을 만들었다. 총열은 우산대로, 공이는 못을 잘라 만들었다. 깡통이 뻥뻥 뚫렸다. 화약을 넣은 유리병을 떨어뜨린 친구 하나는 유리 파편이 튀어서 한쪽 눈을 잃었다. 그 친구도 지금 산불감시원을 하고 있다. 냇가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물고기를 잡다가 손목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훗날 화약 기사가 되고서야 그는 그때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했는지 깨달았다.

희미한 숲길을 따라 걷는 그의 손에 일일 손님을 위한 도시락을 들려 있다.

소년원 근무 시절의 기억

"하루 종일 산불감시탑 안에 홀로 있으면 어떤 기분이죠?"

"스스로를 가두는 느낌이 들어요. 이 자리를 벗어나면 감시를 못 하니까요. 예전에 대전소년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요. 복도에 볼록 튀어나온 감시실에서 재소자들을 지켜봤죠. 밤에는 안전을 위해 제 방을 이중삼중 걸어 잠갔어요. 그때 생각이 나요."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을 전전하던 그는 스물아홉에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해 보호직 공무원이 됐다. 30여 년 전, 그가 근무한 대전소년원은 가장 험한 아이들만 수용해 기술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가장 험악한 김아무개가 대구소년원에서 대전소년원으로 오더니 원장 면담을 하게 해달래요. 안 해주니까 숨겨둔 칼로 뒤통수를 긋기 시작해요. 어우, 끔찍했어요. 200바늘 넘게 꿰맸죠. 그거 보니까 근무할 마음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무전으로 주변 산불감시원의 상황을 보고받고 시청에 보고하는 김이수씨. 오전과 오후 각 두 번씩 총 네 차례 상황을 공유한다.

대전소년원 발령 전 서울소년원에서 한 달간 연수를 받던 때였다. 강원도 정선에 사는 어떤 소년이 빵을 훔쳐서 잡혀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광산에서 발을 다쳐서 다리를 절고 엄마는 집을 나갔다. 소년이 아버지와 여동생에게 쓴 편지를 봤다. 공부 열심히 해서 검정고시 치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를 보고 소명 의식이 생겼는데 못 볼 꼴 숱하게 보니까 소명 의식이 싹 사라지데요. 나중에 또 다른 원생이 자해를 했는데…. 결국 일 년도 못 했어요. 11개월인가. 그만두고 나서 한두 달 뒤에 원생이 또 죽었대요. 잘 그만뒀다 싶었어요."

"그후로 무엇을 했나요?"

"잠깐만요. 무전할 시간이 돼서."

시계바늘은 10시 30분을 가리켰다.

"801호 나오세요."

"801호 □□□ 이상 없습니다."

"807호 나오세요."

"807호 ☆☆☆ 이상 없습니다."

"여기는 감시탑. 계속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씨가 가져온 사과. 문경 사람인 그의 사과 지식엔 막힘이 없다.

늦깎이 문학청년

그는 뒤늦게 대학에 가고 싶었다. 서울대 좋은 학과는 아니더라도 종교학과는 들어가서 미학을 부전공하고 싶었다. 재수해서 서강대를 지원했지만 또 떨어졌다. 결국 삼수 끝에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이 서른셋. 그러나 공부란 혼자 하는 것이란 생각에 중퇴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실수였다고 그는 말한다.

"인생은 참 부조리한 것 같아요. 맨날 돌을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지만 다시 내려가는 시시포스가 꼭 나 같아요. 내려올 걸 알면서도 맨날 가방 메고 올라가고…. 가만 보면 나도 삶에 반항하는 것 같아. 그래서 시시포스가 맨날 그렇게 돌을 밀어 올려서 불행한가 하면 카뮈는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내려가는 순간만큼은 행복할 거라고요. 쉬고, 생각하고, 명상하고 하니까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어렸을 때 쇠똥구리를 봤어요. 참 우습죠. 금덩어리도 아니고 소똥을 몰고 간다는 게. 시시포스보다 쇠똥꾸리가 벌을 더 받나 싶어요. 물구나무를 서가며 굴려가잖아요. (웃음)"

마성면 주민 이일배씨가 주지봉을 300번 오르고 세운 조그만 정상석. 김씨는 700번 넘게 올랐다며, 몇 년 더하고 본인도 이런 정상석을 하나 세우고 싶다고 했다.

오디오북 서재를 보여 달라고 했다. '인터메초', '우유, 피, 열',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가 읽음 표시돼 있었다. 그의 문학적 깊이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며, 문경에도 유명한 작가가 있는지 물었다.

"옛날에 있었죠. 지금은 죽었지만. 신기섭의 '나무 도마'라는 시가 있어요. 그 사람이 참 아깝다고 생각해요. '흰 뱀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쓴 남상순이라는 소설가도 있고. 이런 사람들은 지방 작가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대학교 다닐 때 시를 썼어요. 합평회할 때 함동선 시인이 내 시를 참 좋아해 줬어요. 웬만해선 칭찬 안 하는 이승하 시인의 시평은 아직도 기억해요. 동기들은 내 시보다 그 사람 시평을 보고 더 놀랐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예비 시인에게 경하의 악수를 보낸다."

쌍안경으로 산불을 살피는 김이수씨. 오래 근무해서 연기만 봐도 어떤 연기인지 안다고 한다. 쌍안경은 16배까지 당길 수 있어서 먼 거리의 대상도 정밀하게 잡아낸다.

해가 중천에 뜨자 도시락을 꺼낸다. 반찬은 매실장아찌와 재피된장무침, 그리고 속을 채운 깻잎전이다.

"사모님이 챙겨 줬나요?"

"혼자 살아서 메뉴가 며칠씩 같아요."

그는 서른 너머 공부하고 방황하느라 결혼을 놓쳤다고 했다.

"가족이 있었다면 이렇게 못 살았을 거예요. 자식이 없는 게 아쉬운 건지 좋은 건지.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선택이란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선택을 잘못했어요. 처음부터 그림 장사 같은 거에 손을 안 댔어야 했는데…."

중앙대 문창과를 중퇴하고 그림 장사를 했다. 용산 삼각지에서 그림을 몇 천원에 떼다가 대구에서 몇 만 원에 팔았다. 동네 후배와 동업하다가 부딪혔고, 갈라섰다. 빚 갚느라 5년을 허송세월했다. 이후 어릴 적 경험을 살려 화약 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경북 의성에서 5년, 안동에서 5년 일했다. 그러나 일터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자 화약 기사도 하기 싫어졌다.

그러다 찾아든 것이 속편한 산불감시원이었다.

그는 간식으로 사과를 꺼냈다. 맛없는 것만 남았다는 그의 사과는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달았다. 문경 사과는 유명하다.

"농약은 쳐도 호르몬제나 색깔 내는 건 안 쳐요. 그래서 우리 집 사과는 색깔은 별론데 다들 맛있다 하더라고요. 7월, 8월, 9월, 10월, 11월 따 먹는 게 다 달라요. 여름에는 고이조라, 썸머킹, 골든볼, 8월 말에서 9월 초에는 아리수와 이지풀, 10월 초에는 감홍이 있어요. 이건 부사인데, 부사도 품종이 굉장히 많아요. 11월 중순에 수확해서 다음해 6월까지 저장해요. 늦게 수확해서 오래가니까 사람들이 많이 먹죠."

오정산 골짜기에 김씨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광산 터가 보인다.

산불 우는 소리

대부분 산불이 생활 인접 부주의로 발생한다. 너무 외지고 높은 산뿐 아니라. 마을 주변 언덕배기에 감시탑을 설치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산불감시원과 동네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라, 동네 사람끼리 과태료를 물리기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다고 그는 말한다. 산불감시원이 적발을 하고 시청에서 과태료를 부과하면 산불은 지금보다 더 없어질 것이고, 누구 하나 10만 원 과태료를 무는 순간 동네에 소문이 퍼져 아무도 불을 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으면 여기저기 연기가 나요. 비 오기 전에 불 많이 지르거든요. 비 오면 꺼진다는 거지. 봄 되면 가을철 농작물 찌꺼기랑 생활쓰레기까지. 쓰레기봉투 1,000원도 안 하는데 아깝다고 그걸 태워요. 도시에서 귀농귀촌 온 사람들도 산불 무서운 줄 몰라 태우고요. 그것보다 더 겁나는 게 정신이상자예요. 한 번은 불을 끄라고 하니까 몽둥이 들고 쫓아왔어요. 이 정도면 미친 거지요."

계속 방송하고 잔소리한 효과가 있는지, 올해는 작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아마도 작년에 안동에 산불 크게 났을 때 사람들이 겁을 많이 먹은 것 같다고 김씨는 말했다.

"1985년인가, 문경에 정말 큰 불이 났어요. 솥에 빨래를 삶다가 불이 옮겨 붙었죠. 그 사람 감옥 갔어요. 얼마나 크게 났는지 여기서부터 점촌까지 40리(약 16km)를 다 태웠어요. 그때 불이 우는 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산불감시원 근무 기간은 봄철 2월부터 5월 15일까지 석 달쯤, 가을철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 한 달 보름쯤이다. 예산이 부족해 거의 그 전에 끝난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지 묻자, 간신히 10년 채운 연금과 근로장려금, 180일 근무일수를 채워 2년마다 받는 실업급여를 합치면 혼자 쓰기에 아쉬움 없다고 한다. 이번 여름 물놀이지킴이 한 명을 뽑는 데 지원했는데, 모든 산불감시원이 지원했다고 한다.

"재밌는 에피소드 없어요?"

"그냥 이렇게 멍 때리고 있는 거예요. 아, 친구들이 있어요. 저기에 살던 구렁이가 한 마리가 보이면 반갑다고 인사하고 그랬는데, 몇 년 전부터 안 보이네요. 유혈목이는 한 다섯 마리 있고요. 대가리 쪽이 빨개서 꽃뱀이라 하고, 시골말로 너불메기라고 해요."

벚꽃이 지면 이파리가 돋는데, 이것도 5월이 되면 색이 짙어져서 감흥이 덜하다고 한다. 4월 말 무렵이 참 예쁠 때라고. 머지않아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는데, 온 산에 누렇게 날려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산불이 난 줄 안다고 한다.

"누가 봄에는 꽃 천지라 좋겠다고 해요. 4년 전에 면장이 올라오더니 우와 감탄하더군요. 근데 이제는 그런 걸 보는 것도 귀찮아요. 잠만 자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못 봤다 하면 내 책임이니까 그러지도 못 해요."

시곗바늘은 어느덧 퇴근 시간인 4시 40분을 가리켰다.

"빨리 내려가고 싶지 않으세요?"

"내려가고 싶죠. 4시 20분쯤 되면 조바심이 나요."

"비가 올 때는 근무하지 않나요?"

"네, 대신 일당이 줄어들어요."

"출근해서 비가 내려야 일찍 퇴근하고 좋은 거네요?"

"그렇긴 하죠. 백화산 아래 상내라는 마을에 비가 제일 먼저 와요. 그쪽 감시원이 나한테 무전하죠. '여기 비 오는데 거기 비 안 오냐!' 하면서."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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