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의약품 확대 논의, 해외는 '역주행'…아세트아미노펜 규제 강화 왜?
판매 제한·포장단위 축소·약사 개입 강화로 정책 전환

정부가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 등 편의점 의약품 판매 규제 완화를 검토하는 가운데, 해외 주요 국가들은 오히려 아세트아미노펜(파라세타몰)과 같은 고위험 일반의약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약사의미래를 준비하는모임(이하 약준모) 박현진 회장(약학박사)은 최근 '일반의약품 판매 규제완화와 아세트아미노펜 안전성 문제―스웨덴 사례를 중심으로 한 해외 연구 및 국내 시사점 고찰' 보고서를 통해 해외 주요국의 아세트아미노펜 규제 현황과 일반의약품 판매 규제완화 이후 나타난 안전성 문제를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아세트아미노펜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해열·진통제 가운데 하나로 치료 용량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약물이지만, 과량 복용 시 중증 간독성과 급성 간부전을 유발할 수 있어 공중보건 차원의 관리가 필요한 의약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가정 상비약으로 널리 보급돼 있고 구매가 쉬워 충동적 자해나 의도적 과량복용에 자주 이용되는 약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2009년 약국시장 자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아세트아미노펜을 포함한 일부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허용했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약국뿐 아니라 슈퍼마켓과 편의점, 주유소 등에서도 손쉽게 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규제완화 이후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사례가 증가했다.
Gedeborg 등의 연구에 따르면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발생률은 2009년 인구 10만명당 11.5건에서 2013년 16.2건으로 약 40.5% 증가했다. 특히 청소년과 젊은 성인층을 중심으로 의도적 과량복용 사례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단순한 판매량 증가뿐 아니라 약국 외 판매 허용에 따른 접근성 확대 자체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결국 스웨덴 정부는 재규제에 나서고 스웨덴 의약품청은 2015년 아세트아미노펜 정제 제품의 약국 외 판매를 금지했다. 다만 액상제와 발포정 등 일부 제형은 일반 판매를 유지하는 선택적 규제 방식을 택했다. 충동적 과량복용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정제 형태의 접근성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다.
영국은 포장단위 제한을 통해 위험 관리에 나섰다.
영국은 1998년부터 아세트아미노펜 판매 포장단위를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약국에서는 최대 32정, 약국 외 판매점에서는 최대 16정까지만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연구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 과량복용으로 인한 사망과 간부전, 간이식 관련 지표가 감소한 것으로 보고됐다. 장기 추적 연구에서도 중독 사망과 간이식 등록 건수가 유의하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 역시 최근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호주 의약품청(TGA)은 청소년과 젊은 성인층의 의도적 자가중독 증가 문제를 검토한 뒤 2025년부터 일반 판매용 아세트아미노펜 포장단위를 기존 20정에서 16정으로 축소하고, 약사 감독 없이 판매 가능한 대용량 제품도 절반 수준으로 줄이도록 했다. 또한 정제·캡슐 제품에는 블리스터 포장을 의무화했다.
유럽 21개국을 비교한 연구에서도 약국 외 판매를 제한하거나 포장단위를 규제하는 국가에서 아세트아미노펜 관련 독성정보센터 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경고 신호가 확인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자료를 활용한 연구에 따르면 안전상비의약품 제도 시행 이후 청소년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발생률은 인구 10만명당 2.4건에서 3.8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16~18세 연령층에서는 10.7건에서 23.8건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안전상비의약품 제도 이후 청소년 및 청년층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환자의 중환자실 입원률 증가 가능성도 보고됐다.
박현진 회장은 "해외 사례들은 아세트아미노펜 안전성 관리에서 판매 장소와 구매 가능량이 핵심 정책 변수임을 보여준다"며 "스웨덴은 접근성을 확대했다가 중독 증가가 확인되자 정제 형태를 다시 약국 전용으로 전환했고, 영국과 호주는 포장단위 제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에서도 청소년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증가 가능성이 보고되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한 검증 없이 추가적인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것은 우려스럽다"며 "의약품은 일반 소비재가 아닌 만큼 편의성과 접근성뿐 아니라 안전관리 체계와 공중보건 비용까지 함께 고려한 정책 판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