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만 꾸던 구판장이 현실로…농어촌기본소득 ‘한달 15만원’이 불러온 활기

김소진 기자 2026. 6. 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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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 ‘옥천 석화마을’ 가보니
고령주민 읍내 장보기 ‘중노동’
이젠 신청만 하면 마을서 해결
봉사·무상노동 의존 운영 한계
기존 농촌지원 정책 연계 필요
5월30일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화리 마을 구판장에서 임덕현 석화리 이장(61·오른쪽)이 주민이 고른 물건을 계산하고 있다. 석화리 구판장은 옥천군이 지난해 12월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뒤 올해 3월14일 문을 열었다.

토요일이었던 5월30일 정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화리의 마을 구판장은 주민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매주 토요일 점심시간이면 마을 공동급식소에서 함께 식사를 마친 주민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구판장에 들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간다. 주민들의 손에는 손주들이 좋아한다는 짜장라면 몇봉지, 남편과 나눠 먹을 달걀 한판, 냉동만두 등이 들려 있었다.

공동급식소 한편에 마련된 이 작은 공간에는 석화마을회에서 직접 생산한 ‘순우리밀 가루’와 케첩 등 각종 조미료, 박카스 같은 식료품부터 부탄가스·살충제·방향제 등 공산품까지 70여 품목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루 평균 15명 안팎의 손님이 다녀가는 이곳에서 한번에 10만원 이상을 결제하는 ‘큰손’ 주민도 적지 않다. 매월 15만원씩 농어촌기본소득이 지급되면서 주민들이 누리게 된 호사(豪奢)다.

석화리에 이런 일상이 자리 잡은 건 올 3월14일 마을 구판장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옥천군이 지난해 12월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자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협동조합을 결성해 숙원이었던 구판장을 세웠다. 20여년 전 마을의 유일한 점방이 사라진 이후 생필품 하나를 사려 해도 읍내행 버스를 마냥 기다려야 했던 불편이 비로소 해소된 것이다.

임덕현 석화리 이장(61)은 “마을사업으로 구판장을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농어촌기본소득이 도입되면서 현실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임 이장은 “어르신들이 읍내에 나가 장을 본 뒤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 부피가 큰 물건들을 들고 고생하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며 “수익 목적이 아닌 일종의 서비스 개념으로 시작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생활편의성이다.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농촌마을 특성상 읍내까지 나가는 장보기는 그 자체로 큰 노동이었다. 이명화씨(77)는 “이전에는 장바구니용 손수레를 끌고 버스를 탄 뒤 읍내까지 가느라 장 한번 보는 데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며 “이제는 필요한 물건을 마을에서 바로 살 수 있어 편하다”고 했다.

구판장은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신선식품 조달은 물론 주민 개별 수요에 맞춘 ‘맞춤형 만물상’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홍연희씨(64)는 “이전에는 식료품을 사려면 버스를 타고 나가거나 5만원 이상 금액을 맞춰 배달시켜야 했는데 이제는 그런 불편이 해소됐다”며 “최근에는 구판장을 통해 오리고기를 구입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라면이나 만두 같은 간식류부터 신선식품까지 필요한 물품을 미리 요청하면 구판장이 열리는 토요일 전에 확보해 전달하는 주민 맞춤형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결과다.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구판장 최고 인기 품목으로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종전까진 상점과 거리가 멀어 녹기 쉬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농어촌기본소득을 활용해 아이스크림을 한번에 20∼30개 구매한 뒤 정자나 마을회관에 모여 이웃들과 나눠 먹는 일이 석화리의 일상이 됐다. 임 이장은 “의외로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품목이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류”라며 “기본소득으로 산 주전부리를 이웃들과 나눠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기본소득이 바꾼 마을 풍경”이라고 말했다.

석화리는 마을 기금으로 공동급식소를 운영하고 홀몸어르신 도시락 배달을 지속하는 등 자치 토양을 다져온 곳이다. 마을의 자치 역량은 농어촌기본소득 도입으로 날개를 달았다. 오랫동안 구상에 머물렀던 구판장 개설이 현실화된 것도 그 방증이다. 구판장의 성공적인 안착을 토대로 석화리는 고령주민들의 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마을 식당’과 ‘마을 요양원’ 설립이라는 중장기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옥천의 인구증가 사례를 들면서 “농어촌기본소득을 지속사업으로 확정하고 지급액을 더 높이면 지역소멸을 막고 국토균형발전을 이루는 일석다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 영구화와 금액 상향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주민들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현장의 변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구조적 과제도 적지 않다. 구판장 운영이 이장을 비롯한 일부 주민의 자발적 봉사와 무상 노동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전문가들과 현장 주민들은 농어촌기본소득이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기존 농촌 지원 정책, 공공일자리 사업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처별로 나뉜 사업을 따로 추진하기보다 주민들의 실제 생활 수요에 맞춰 묶어낼 때 실질적인 농촌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인정 농촌돌봄연구소장은 “농촌 기본사회로 나아가려면 부처별로 사업을 쪼개 내려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석화리 사례처럼 주민 일상에 필요한 수요를 파악하고 기존 공공일자리 등 관련 사업을 거점 공간 중심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임 이장은 “최소한의 인건비 보전이나 공공일자리 연계를 통해 청년층을 유입하고 마을 활동가를 육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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