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스위스판 브렉시트 막았다… ‘인구 1000만 제한’ 국민투표 부결될 듯
극우정당 발의한 인구상한제 국민투표
중간 개표 '찬성 46.4%, 반대 53.6%'
이민자 급증으로 인한 주거비 상승보다
경제성장과 EU관계 우선시한 결과 해석

14일(현지시간) 실시된 스위스 총인구를 1,000만 명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인구상한제 찬반 국민투표가 부결될 전망이다. 이민자 급증으로 인한 주거비 상승 등의 문제보다 경제성장과 유럽연합(EU)과의 관계를 우선시한 결과라는 해석이다.
스위스 연방통계청 개표 시스템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한국시간 오후 10시) 기준, 찬성 46.4%, 반대 53.6%로 찬성 의견이 과반을 넘지 못했다. 2050년까지 국가 총인구를 1,000만 명이 넘지 못하게 통제한다는 내용의 발의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현장 투표는 이날 정오쯤 마무리됐다. 유권자 90%는 사전에 우편투표를 실시했다.
이 발의안은 극우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 주도했다. 총인구 상한을 설정하자는 다소 황당한 발상 뒤엔 이민자 유입을 막겠다는 속뜻이 숨어있다. 발의안이 통과되면 2050년까지 인구가 1,000만 명을 넘는 걸 막기 위해 950만 명이 되면 정부는 이민 규제 강화, EU와 맺은 자유로운 이동 협정(솅겐조약) 파기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현재 스위스 인구는 910만 명으로 이 중 27%가 외국인이다.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13일 기자가 찾은 취리히 중앙역에선 ‘새로 짓는 주택 10채 중 9채는 이민자를 위한 것이다’, ‘망명 신청자들은 강간 범죄를 스위스인보다 11배 더 많이 저지른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SVP가 내건 광고판이다. 실제 검증된 내용이 아니어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마케팅이란 비판이 나왔다. “6월 14일, 1,000만 명 스위스를 멈추게 하자”는 구호 옆엔 취리히 공식 언어인 독일어로 “찬성”을 뜻하는 “JA”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이민자에게 빗장을 걸어 잠그면 외국인 고급 인력에 의존하는 스위스 글로벌 제약 회사 노바티스와 로슈, 식품기업 네슬레 등이 타격받을 것이란 비판을 의식한 듯, SVP는 ‘이민자 10명 중 1명만 고숙련 노동자’라는 문구도 광고판에 넣었다.
투표일 임박해서도 찬반 팽팽

2002년만 해도 730만 명이었던 스위스 인구는 20여 년 만에 25%나 급증했다. 높은 임금과 낮은 세금에 끌린 이민자들이 몰려든 결과였다. 금융, 기술뿐 아니라 의료, 건설, 외식업까지 종사한 이들이 경제성장을 떠받쳤다는 평가도 있지만 최근엔 주택 부족으로 인한 주거비 상승과 교통 체증, 공공서비스 부담의 주범으로 몰렸다. 이주민을 차별, 배제한다는 비판에도 찬성 여론이 확산된 이유다. 반면 재계는 노동력 부족과 산업 전반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며 “자해적 행위”라고 반대했다.
결과는 이날 오전까지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안갯속이었다. 10만 명 지지 서명을 받은 현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스위스에선 통상 투표일이 임박하면 찬성표가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이번엔 투표 한 달여를 앞두고 공개된 여론조사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갈렸다.
주거비 상승 주범으로 몰린 이민자들

전날 취리히 중앙역 인근에서 만난 파비엔(49)과 사라(22)는 “이민자 유입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며 “20년 전만 해도 이민자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지금은 각종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취리히 외곽에 사는데 우리 동네에선 이민자 옆만 지나가도 마약 냄새가 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전에 우편투표를 마쳤다는 네이딘(35)은 “이 도시는 이미 포화상태로 어딜 가나 붐빈다. 임대료도 많이 올랐고 대중교통은 늘 만원인데 달라지는 게 없어 찬성했다”며 “특히 학교는 과밀 상태로, 각국에서 온 아이들은 독일어를 못하는데 우리 아이 언어 능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반면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이먼(45)은 “인구 총량을 제한하는 방향은 올바른 해결 방식이라 할 수 없다”며 “집값 상승도 이민자 그룹 때문만이 원인은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브렉시트 악몽 재현 우려 막았다

전문가들은 2016년 근소한 표차로 영국의 운명을 가른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악몽이 스위스에서도 재현되는 것을 막은 것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이민을 통제하기 위해 상당수 영국 국민들이 탈퇴에 표를 던졌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이동 제한에 따른 노동력 부족 △EU 단일시장 접근 제한으로 인한 경제 성장 둔화를 겪고 있어서다.
취리히에 본사를 둔 여론조사기관 소토모의 대표 미샤엘 헤르만은 한국일보에 “브렉시트는 스위스에 중요한 경고 사례였다”며 “이민 통제권을 되찾고자 했던 영국의 애초 목표와 달리 정반대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미 스위스의 선별적 참여(체리피킹)에 불만을 가진, 단일 최대 수출시장인 EU와 관계 악화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스위스에도 최고 수준의 관세를 부과한 상황에서 EU와의 갈등은 자충수에 가깝다는 뜻이다.
뇌샤텔대 이주와 시민권 분야 교수인 지아니 다마토는 “국민투표가 통과했더라도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다”며 “인구는 움직이는 자동차와도 같아서 브레이크를 밟아도 즉시 멈추기 힘들다. 인구 상한 설정은 기술 변수처럼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법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긴장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리히=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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