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가 강간 11배" 공포 마케팅까지… 스위스 초유의 '인구제한' 투표 [르포]

정승임 2026. 6. 1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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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찬반 갈린 스위스 현지 르포]
'이민 막기 위해 총인구 1000만 상한 설정'
극우정당이 발의해 14일 국민투표 실시
주거비 상승·교통체증 불만에 찬성 증가
"이민 통제하려다 경제성장만 둔화한
영국 브렉시트 악몽 재현될 것" 반대도
인구상한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13일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에 극우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 내건 광고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광고판에는 '이민자 10명 중 1명만이 숙련노동자', '새로 지은 주택 10채 중 9채는 이민자를 위한 것', '망명 신청자는 스위스인보다 강간범죄를 11배 더 많이 저지른다'는 내용이 담겼다. 취리히=정승임 특파원

‘새로 짓는 주택 10채 중 9채는 이민자를 위한 것이다.’

‘망명 신청자들은 강간 범죄를 스위스인보다 11배 더 많이 저지른다.’

스위스 인구를 1,000만 명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인구상한제 찬반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13일(현지시간), 경제중심지 취리히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이 같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번 안건을 발의한 극우 성향 스위스국민당(SVP)이 내건 광고판이다. 실제 검증된 내용이 아니어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마케팅이란 비판도 나온다. “6월 14일, 1,000만 명 스위스를 멈추게 하자”는 구호 옆엔 취리히 공식 언어인 독일어로 “찬성”을 뜻하는 “JA”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총인구 상한을 설정하자는 다소 황당한 발상 뒤엔 이민자 유입을 막겠다는 속뜻이 숨어있다. 발의안에 따르면 2050년까지 인구가 1,000만 명을 넘는 걸 막기 위해 950만 명이 되면 정부는 이민 규제 강화, 유럽연합(EU)과 맺은 자유로운 이동 협정(솅겐조약) 폐기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현재 스위스 인구는 910만 명으로 이 중 27%가 외국인이다. 이민자에게 빗장을 걸어 잠그면 외국인 고급 인력에 의존하는 스위스 글로벌 제약 회사 노바티스와 로슈, 식품기업 네슬레 등이 타격받을 것이란 비판을 의식한 듯, SVP는 ‘이민자 10명 중 1명만 고숙련 노동자’라는 문구도 광고판에 넣었다.


투표일 임박해서도 찬반 팽팽

인구상한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13일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에 극우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 내건 광고판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광고판에는 '이민자 10명 중 1명만이 숙련노동자', '새로 지은 주택 10채 중 9채는 이민자를 위한 것', '망명 신청자는 스위스인보다 강간범죄를 11배 더 많이 저지른다'는 내용이 담겼다. 취리히=정승임 특파원

2002년만 해도 730만 명이었던 스위스 인구는 20여 년 만에 25%나 급증했다. 높은 임금과 낮은 세금에 끌린 이민자들이 몰려든 결과였다. 이들이 스위스 경제성장을 떠받쳤다는 평가도 있지만 최근엔 주택 부족으로 인한 주거비 상승과 교통 체증, 공공서비스 부담의 주범으로 몰렸다. 이주민을 차별, 배제한다는 비판에도 찬성 여론이 확산된 이유다. 반면 재계는 노동력 부족과 산업 전반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다.

투표 결과는 14일 오전까지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안갯속이다. 10만 명의 지지 서명을 받은 현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스위스에선 통상 투표일이 임박하면 찬성표가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이번엔 투표 한 달여를 앞두고 공개된 여론조사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갈릴 정도로 초접전 양상을 보였다. 4월 말 공개된 조사에선 찬성 52%, 반대 46%였고 지난달 말엔 찬성 47%, 반대 52%로 나타났다. 찬반이 47%로 동률인 경우도 있었다. 취리히에 본사를 둔 여론조사기관 소토모의 대표 미샤엘 헤르만은 한국일보에 “최근 조사는 반대로 약간 기울었지만 여전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주거비 상승 주범으로 몰린 이민자들

스위스 인구상한제 찬반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13일, 취리히 시내를 이동하는 트램이 만원 상태다. 인구상한제 찬성론자들은 이민자 증가가 교통 과밀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취리히=정승임 특파원

취리히 중앙역 인근에서 만난 파비엔(49)과 사라(22)는 “이민자 유입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며 “20년 전만 해도 이민자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지금은 각종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취리히 외곽에 사는데 우리 동네에선 이민자 옆만 지나가도 마약 냄새가 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전에 우편 투표를 마쳤다는 네이딘(35)은 “이 도시는 이미 포화상태로 어딜 가나 붐빈다. 임대료도 많이 올랐고 대중교통은 늘 만원인데 달라지는 게 없어 찬성했다”며 “특히 학교는 과밀 상태로, 각국에서 온 아이들은 독일어를 못하는데 우리 아이 언어 능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반면 우편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이먼(45)은 “인구 총량을 제한하는 방향은 올바른 해결 방식이라 할 수 없다”며 “집값 상승도 이민자 그룹 때문만이 원인이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브렉시트 악몽 재현 우려

인구상한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13일 스위스 취리히 시민들이 시내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 취리히=정승임 특파원

전문가들은 2016년 근소한 표차로 영국의 운명을 가른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악몽이 스위스에서도 재현될 것을 우려했다. 이민을 통제하기 위해 상당수 국민들이 탈퇴에 표를 던졌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이동 제한에 따른 노동력 부족 △EU 단일시장 접근 제한으로 인한 경제 성장 둔화를 겪고 있어서다.

헤르만 대표는 “인구상한제가 통과되면 그 실행 방식을 둘러싸고 정치적 논쟁이 거세질 것이고 그 불확실성은 경제 전반에 매우 부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며 “수년 단위로 투자와 고용 계획을 세우는 기업은 필요한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솅겐조약 폐기 가능성까지 감안하는 상한제는 정반대 신호를 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브렉시트는 중요한 경고 사례”라며 “이민 통제권을 되찾고자 했던 애초 목표와 달리 정반대 상황을 초래했다”고 덧붙였다. 스위스는 영국처럼 단일 최대 수출시장인 EU와의 관계 악화도 감수해야 한다.

뇌샤텔대 이주와 시민권 분야 석좌교수인 지아니 다마토는 한국일보에 “스위스 경제는 금융, 기술 등의 고숙련 인력뿐 아니라 대학, 돌봄 노동, 건설, 호텔∙외식업까지 외국인 노동력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며 “이민을 막으면 인력이 부족해지고 인구 고령화를 가속화해 연금 및 사회보험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민은 종종 주거비 상승, 교통 혼잡, 도시 과밀화, 농지 부족과 같은 문제의 유일한 원인으로 설명되지만 이는 정부의 계획, 투자 지연, 지역 분배정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꼬집었다.

취리히=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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