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료 0원, 몰입도 100%…월드컵보다 짜릿한 모래판 위 한판승부
풍년 기원하며 즐기던 놀이
충북 보은서 8~14일 열려
노련함과 패기 맞붙는 무대
한순간 허점 노리는 수싸움
체급별 다른 기술 관전 재미
황소 트로피 향한 경쟁 치열
현장 가득 함성…직관 ‘짜릿’

“밭다리 조심! 중심 낮추고, 자 차분하게 해! 집중!”
모래판 양옆, 정갈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감독들의 다급한 외침과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관중석의 응원 소리가 한데 뒤섞인다. 숨이 막힐 듯 팽팽하게 맞잡은 샅바, 단 몇초 만에 승부가 결정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순식간에 상대를 들어 올리며 사방으로 모래가 튀는 이곳은 찰나의 미학이 살아 숨 쉬는 씨름 경기장이다.
음력 5월5일은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우리의 큰 명절 ‘단오’이자 법정기념일인 ‘씨름의 날’이다. 조상들이 양기가 가장 강하다며 길일로 여겼던 이날, 주민이 다같이 모여 화합하고자 즐기던 민속놀이가 바로 씨름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잇기 위해 매년 열리는 ‘단오장사씨름대회’에는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선수들이 총출동한다.
올해는 충북 보은군 보은국민체육센터에서 8일부터 14일까지 7일간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특히 이번 대회는 1년 중 유일하게 대학부 유망주가 실업팀 선배와 계급장을 떼고 맞붙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 현장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할 것 같지만 무료다. 그것 말고도 씨름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알아야 면장이라고 하지 않나.
모든 운동경기 입문은 뛰어난 선수를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씨름 역시 체급이 가진 고유한 호흡을 이해하고 모래판을 호령하는 간판선수간 대결 구도에 초점을 맞추면 경기를 해석하는 수준이 달라진다.
가장 가벼운 남자 소백급(72㎏ 이하)은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황찬섭을 중심으로 날렵한 발재간을 앞세운 예측 불허의 속도전이 벌어진다. 태백급(80㎏ 이하)은 허선행·문준석 같은 베테랑과 유망주 이용훈이 패기 있게 맞선다.
금강급(90㎏ 이하)은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백전노장 최정만에게 경쟁자 김기수·정종진이 도전장을 내민다. 씨름의 꽃인 백두급(140㎏ 이하)은 괴물 장사 김민재의 독주를 장성우가 막아서는 양상으로 거구끼리의 용쟁호투가 소싸움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칠다.
여자 씨름 역시 매화(60㎏ 이하)·국화(70㎏ 이하)·무궁화(80㎏ 이하) 체급에 따라 관전 재미가 달라진다. 최석이 거제시청씨름단 감독은 “여자 씨름은 넘어질 듯하면서도 끝내 중심을 잡아내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유연함과 섬세한 수싸움이 백미”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양윤서·김다영이 두각을 나타냈다. 역대 최다 우승 경력을 자랑하는 양윤서 선수는 체급을 올려 출전한 국화급에서 노련한 되치기로 25번째 황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김다영 선수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강력한 우승 후보 김하윤을 누르고 무궁화급 정상에 우뚝 섰다.
선수들을 눈에 익혔다면 모래판 위에서 펼쳐지는 ‘기술의 묘미’에 주목할 차례. 씨름은 시작과 동시에 서로 살결을 맞대고 숨소리가 뒤섞이는 상태에서 맞붙는다. 한판당 제한 시간은 1분이지만 실제 승부는 불과 5초 안팎에 갈린다.
그중에서도 허리와 하체의 폭발적인 힘으로 상대를 번쩍 들어 넘기는 ‘들배지기’는 난도가 높지만 삽시간에 무게중심을 무너뜨릴 수 있어 천하장사들이 많이 쓴다. 최 감독은 “힘이 7이요 기술이 3이라는 ‘역칠기삼(力七技三)’의 정수가 바로 들배지기다. 이 기술이 주특기인 선수들이 씨름판을 장악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현대 씨름은 제도를 정비하면서 승부의 판가름 속도가 빨라지고 박진감도 한층 커졌다. 1990년대 후반 선수들이 몸집을 불린 후 수비에 치중하는 전략을 많이 구사하자 대한씨름협회는 경기 시간을 단축하고 체중 상한선을 뒀다. 그 결과 요즘 선수들은 기습적인 안다리걸기와 허점을 파고드는 밀어치기·잡채기 같은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1∼2초 만에 승부를 낸다.
난관을 뚫고 최정상인 ‘장사’에 등극하면 3000만원의 상금과 함께 금색 두루마기(장사복)를 입고 꽃목걸이를 건다. 풍요를 상징하는 황소 모양의 트로피도 품에 안는다.
강대규 대한씨름협회 기획차장은 씨름을 오롯하게 즐기려면 ‘직관(경기장에 와서 직접 관람한다는 뜻)’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눈앞에서 교차하는 선수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환호성을 온몸으로 마주할 수 있어서다. 모래판 양옆에서 선수와 함께 엉덩이를 들썩이는 감독들이 초초해하거나 흥분하는 모습, 시시각각 변하는 양 진영의 불꽃 튀는 심리전을 지켜보는 것도 직관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명절 대회를 포함해 일년에 열두차례 정도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씨름판. 어깨를 맞붙여 몸을 부딪치고 넘어질 듯하면서도 끝내 전세를 뒤바꿔버리는 이 치열한 부대낌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모래판 위에 달궈진 사람 냄새와 짜릿한 전율이 당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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