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어머니에게서 딸로 흘렀다… 제네바에 닿은 제주 해녀의 시간
모녀·고부·자매로 이어진 ‘가문해녀’ 조명… 자연과 공존해온 제주의 삶, 국제사회 소개

제주 바다는 한 세대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들여마신 숨은 딸에게 전해지고, 그 딸은 다시 다음 세대에게 바다의 기억을 물려줍니다.
해녀들이 수백 년 동안 이어온 바다의 시간은 이제 섬을 넘어 세계를 향합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맞아 스위스 제네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본부에서 열리고 있는 《숨, 바다를 잇다(Breath of the Sea)-가문해녀(家門海女, Lineage Haenyeo)의 기록》 사진전.
지난 11일(현지시간) 열린 개막 행사는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제주 해녀들의 삶과 공동체의 기억을 국제사회와 공유하는 자리였습니다.
제주해녀문화협회가 주관하고 IUCN 협력으로 마련된 행사에는 국제기구 관계자와 제네바 시민, 스위스 한인사회 구성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제주 해녀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함께 나눴습니다.

■ 물질보다 오래 남은 것은
해녀들은 바다에서 전복과 소라를 채취합니다.
하지만 해녀사회가 다음 세대에 남겨온 것은 해산물보다 더 오래가는, ‘어떤 것‘들이었습니다.
물때를 읽고 바람을 살피는 법, 욕심내지 않는 채취의 원칙 혹은 함께 바다에 나간 동료를 끝까지 살피는 공동체의 규범이었습니다.
몸에서 몸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경험과 지혜는 오늘날 제주의 해녀사회를 지탱해 온 무형의 자산이기도 합니다.
전시 중심에 놓인 ‘가문해녀’는 바로 그 전승 과정을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가문해녀는 모녀와 자매, 고부 등 한 집안 안에서 해녀문화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현상 자체를 뜻합니다.
제주에서는 오랫동안 이런 바다의 경험이 가족 안에서 전해졌습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배운 물질은 딸의 삶이 됐고, 그렇게 이어온 시간은 제주해녀문화를 지탱하는 토대가 됐습니다.
이번 전시가 가문해녀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해녀문화를 기술의 전승이 아닌 삶의 전승으로 조명하기 위해서입니다.

■ 자연보전본부가 주목한 이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보전 국제기구인 IUCN 본부입니다.
행사 장소 자체가 전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해녀들은 산소통 등 기계 장비 없이 자신의 숨에 의지해 바다로 들어갑니다.
또 필요한 만큼만 채취하고 어린 개체와 산란기 자원은 보호하며 바다와 공존하는 방식을 이어왔습니다.
지속가능성과 생태 보전이 국제사회의 핵심 의제가 된 지금, 제주 해녀들이 오랫동안 실천해 온 삶의 원칙은 세계 무대에서 새로운 의미로 읽히고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2016년 제주해녀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당시에도 물질 기술뿐 아니라 공동체 문화, 세대 간 전승 체계, 전통 지식,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만큼 이번 제네바 전시는 제주 해녀문화가 지닌 보편적 가치가 국제사회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진, 세월을 붙잡다
전시장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양종훈 제주해녀문화협회 이사장이 20여 년 동안 기록해 온 가문해녀 사진 작품 15점이 전시됐습니다.
사진 속에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제주 여성들의 세월이 온전히 담겼습니다.
깊게 패인 주름과 거친 손,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해녀문화가 이어져 온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며 설명을 들었고, 제주 여성들의 삶과 해녀문화가 품고 있는 전승의 의미를 곱씹었습니다.
특히 제주에서 직접 찾은 강옥래 상군 해녀와 김보림 해녀는 전시의 선명성을 더하면서 의미를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50여 년 동안 물질을 이어온 강옥래 해녀는 어머니와 언니 등 가족이 모두 해녀인 대표적엔 가문해녀입니다.
김보림 해녀 역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해녀인 경우로, 세대를 잇는 제주 해녀문화의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관람객들은 사진 속 인물들이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제주 바다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 제주의 바다가 만든 원
개막식에 이어 열린 특별공연 《숨, 바다를 잇다》 역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부혜숙 대한무용협회 제주시지부장이 연출한 공연은 해녀 노동요와 제주 민요, 창작무용을 결합한 비언어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강옥래 해녀를 비롯한 출연진들은 〈오돌또기〉, 〈서우젯소리〉, 〈해녀 노젓는소리〉 등을 통해 제주 바다의 숨결과 해녀들의 삶을 표현했습니다.
행사 마지막에는 참석자들이 〈아리랑〉과 〈강강수월래〉 선율에 맞춰 손을 잡고 원을 그리는 참여형 퍼포먼스도 이어졌습니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원 안에 선 사람들은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화합을 기원했습니다.
제주 바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제네바 한복판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 순간이었습니다.
양종훈 제주해녀문화협회 이사장은 “가문해녀는 제주해녀문화가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가장 생생한 증거”라며 “해녀들의 삶과 공동체 정신, 자연과 공존하는 가치가 세계인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전시는 14일까지 IUCN 본부 전시실에서 열립니다.
사진 속 해녀들은 서로 다른 세월을 살아왔지만, 바다는 같은 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 속에는 바다를 삶터로 삼아온 제주 여성들의 역사와 세대를 잇는 가족의 기억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지금도 제주 바다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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