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막는다며 깬 세검정 일대 너럭바위… 역사 현장 훼손 논란 [하상윤의 멈칫]
침수 원인은 도로 경사인데, 엉뚱하게 파헤친 하천 바닥
조경석 쏟아부은 무용지물 산책로… 좁아진 '물그릇'
제각각 달린 복개천 여닫이 수문, 키워버린 범람 위험
보전도 연구도 없이 흉물로 전락한 '역사 하천'

서울 종로구 세검정 인근 홍제천. 굴착기 한 대가 하천 한가운데서 쉴 새 없이 바닥을 파내려가고 있다. 강철이 닿을 때마다 오랜 시간 물살이 다듬어놓은 넓은 너럭바위가 부서져 나갔다. 깨져나간 암반에서 쏟아진 돌가루가 덮치면서 하천은 금세 새하얗게 탁해졌다. 시뿌연 물길은 그대로 하류를 타고 흘러 세검정 정자가 올라앉은 차일암 앞까지 번져갔다.

현장을 지켜보던 토박이 주민 A씨는 "내가 사랑하는 마을 경관이 훼손되는 걸 보고 있는 게 너무나 고통스럽다”면서 “채 100년도 못 사는 인간들이 수천 년 된 자연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공사를 주도하는 종로구청이 내건 명분은 '수해 예방'이다. 구청 측은 고질적인 침수 위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천 바닥의 암반을 낮추는 정비가 필수적이라며 준설 공사를 벌이고 있다.

굴착기가 파내려가는 이 하천 구간은 조선의 국가 제지 기관인 조지서 터(세검정로 267)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50m 남짓 떨어진 곳이다. 태종 15년(1415) 설치돼 고종 19년(1882)까지 약 470년간 존속한 조지서는 조선 기록문화의 산실이었다. 초기 지폐인 저화, 대명 외교문서, 훈민정음 간행,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 국가의 기록과 행정을 떠받친 국립 제지공장이었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소속 지장(종이 뜨는 장인)만 81명에 달했다. 이 거대한 국가 시설이 세검정 골짜기에 자리 잡은 이유는 명확하다.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맑은 물이 풍부해 종이를 뜨기 좋았고, 넓은 너럭바위가 곳곳에 펼쳐져 떠낸 종이를 말리기에도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홍제천이라는 자연환경이 조지서의 핵심 생산설비 중 하나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검정 정자가 올라앉은 너럭바위 차일암에서 사관들이 사초(역사 편찬 기초 자료)를 씻어 지운 뒤 말리던 세초 의식을 치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의 핵심은 구청이 내세운 수해 예방이라는 명분 자체가 현장의 사실과 완전히 어긋난다는 점이다. 본지가 입수한 지난해 수해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공사 구간 앞 주택가를 덮친 물은 홍제천 본류가 둑을 넘어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세검정로를 타고 쏟아져 내려온 빗물이 잘못된 도로 경사(구배) 탓에 옹벽이 만든 좁은 통로로 쏠렸고, 이 통로가 거대한 물길로 변해 옹벽 안쪽 집들을 집어삼킨 것이다.


침수의 진짜 원인은 하천의 범람이 아니라 도로 배수 실패였던 셈이다. 주민 B씨는 "2019년 침수 피해 직후, 물길이 집으로 향하지 않도록 도로 기울기를 조정하는 방지턱과 차수막 설치를 구청에 요구해왔다”면서 “2025년 다시 큰 수해를 당할 때까지도 구청은 들은 체 만 체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상류로 눈을 돌리면 모순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치수의 기본은 물을 담을 수 있는 '물그릇', 즉 하천의 통수단면적을 최대한 넓게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사 구간 바로 위쪽에는 정작 그 물그릇을 뺏어버린 거대한 인공 산책로가 버티고 있다. 원래 있던 너럭바위 위에 외부 조경석을 겹겹이 쌓고 콘크리트를 부어 최대 1.5미터가 넘는 단을 올려놓은 구조물이다. 이마저도 얼마 못 가 뚝뚝 끊겨 이용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한쪽에서는 거대 구조물로 물길을 좁혀놓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부작용을 상쇄하겠다며 하천 암반을 깨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폭우 때 상류에서 떠내려온 조경석들을 치우기는커녕, 떨어진 그 자리에 시멘트를 발라 하천 바닥에 고정해버린 황당한 시공도 확인됐다. 물길을 넓히겠다면서 오히려 장애물을 바닥에 굳혀버린 것이다.

석연치 않은 점은 또 있다. 공사 구간 바로 앞에는 본류와 나란히 흐르는 복개천이 있다. 주민 B씨의 증언에 따르면, 구청은 2024년 초 본류와 이 복개천을 잇는 수문 여러 곳에 한쪽으로만 열리는 '플랩 게이트(flap gate)'를 설치했다. 문제는 개폐 방향이다. 폭우로 본류 수위가 높아질 때 보조 물길인 복개천이 물을 나눠 받아야 본류로 쏠리는 유량을 분산시킬 수 있다. 하지만 구청은 본류에서 복개천으로 향하는 물길을 원천 차단하는 방향으로 게이트를 달아버렸다. 비가 많이 올수록 물은 본류에만 쏠리는 구조, 곧 하천의 '물그릇'을 스스로 좁혀버린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다음 벌어진 촌극이다. 2025년 여름 수해가 발생한 뒤 게이트 방향이 잘못됐다는 주민의 항의를 받고서, 구청은 전체 수문 중 해당 민가 앞 게이트의 방향만 슬그머니 뒤집어 놓았다. 설계가 옳았다면 바뀔 이유가 없는 사안이다. 주민 B씨는 "이런 식의 공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면서 “주민 안전을 위험한 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사가 벌어지는 이 구간을 포함해 400m 남짓한 홍제천 변에는 조지서 터와 장의사 터, 세검정이 잇따라 자리한다. 신라의 사찰과 조선의 국가 제지 기관, 선비들의 정자가 한 골짜기에 층층이 포개진 보기 드문 역사 공간이다. 하지만 덩그러니 표지석 하나만 서 있을 뿐, 문화유산으로 보살피려는 움직임은 전무하다. 형난옥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는 “이 일대의 하천과 너럭바위는 단순한 경관이 아니다”라며 “자연환경이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전통 한지 제조를 가능하게 한 귀중한 산업유산이자 역사문화경관일 수 있어서 반드시 제대로 살피고 온전히 보전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코너 몰린 정청래, '강성 당원' 앞세워 돌파?... 사퇴론에 보완수사권 카드 꺼냈다-정치ㅣ한국일
- 盧 사위 곽상언 "노무현재단, 유시민 위한 곳인가" 작심 비판-정치ㅣ한국일보
- 정원오 측, 정청래 '언팔'·송영길 '팔로우' 루머에 "사실 아냐"-정치ㅣ한국일보
- '건강 이상설' 씻어낸 최불암 근황… "특유의 '파하' 웃음 여전해"-문화ㅣ한국일보
- 이 대통령이 판 깔아주자, 이재용 "이탈리아, 삼성에 특별한 국가" 세일즈-정치ㅣ한국일보
- '잠실 시위대' 의식? 尹, 또 옥중 메시지… "청년들 위해 기도"-사회ㅣ한국일보
- 손흥민 빼고 오현규, BBC "이래서 감독이 거액 연봉 받는 것"-국제ㅣ한국일보
- 비상용 투표용지도 부족했다… 서울 25개 자치구 전부 규정 미달-정치ㅣ한국일보
- "도장만 쿵쿵" 선관위 전현직들 입 열었다… "신의 직장, 괜히 나온 말이겠나"-정치ㅣ한국일보
- 김은희 작가 "장항준 감독, 거들먹거려… 아직도 내 돈 쓴다" 폭로-문화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