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까지 수입 산업으로"…싱가포르의 무서운 계산법 [한민오의 국제중재 프리즘]

한민오 2026. 6. 13. 14:0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콴유의 친기업 정책부터 국제중재 산업화까지
정부가 직접 키운 '국제분쟁 시장'…매년 수천명 몰려
한국 기업도 매년 상위 이용국…SIAC 사건 886건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국제중재의 허브이다. 우선,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에서 다루는 사건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2025년 한 해에만 신규 사건 886건을 처리했다. 그중 국제 사건이 89%이니, 아시아에서 국제중재 사건 상당수는 매년 싱가포르에서 처리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5년에 SIAC를 이용한 당사자들의 국적만 해도 79군데이다. 중국이나 인도 회사들이 많지만, 한국 회사들도 매년 상위 10개국 안에 든다. 전체 분쟁 가액은 어떠한가? SIAC 사건들의 총분쟁 가액은 2025년에 도합 미화 약 145억 달러(약 22.3조원)에 달했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를 놓고 보더라도 가장 인기가 많은 중재 장소 중 하나다.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이 수행한 2025 국제중재 조사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런던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호되는 중재 장소로 평가되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싱가포르가 국제중재의 허브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필자는 작년 3월부터 현재 싱가포르에 상주하면서, 싱가포르의 내부 사정들을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싱가포르가 국제중재 중심지로 도약하게 된 배경에는 싱가포르의 기업 정신을 빼놓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를 이해하려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세기, '국제 상거래 허브'되다

싱가포르 항구는 연중 태풍이 거의 없고, 지리적 이점이 많아 개방형 항구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오늘날, '근대 싱가포르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인 Sir Thomas Stamford Raffles 경은 1819년 즈음에 이곳을 영국의 자유 무역 거점으로 만들었다.

Raffles 경은 해상무역과 국제 상거래를 싱가포르에서 활성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싱가포르는 지금까지도 이 Raffles 경의 업적을 널리 기리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엘리트 고등학교가 Raffles 고등학교이고,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 Raffles Hotel이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쇼핑몰 중 하나가 Raffles City 쇼핑몰이다.

Raffles 경의 업적은 무엇보다 싱가포르에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법제도 기틀을 마련한 데 있다. 그는 19세기에 전 세계 상거래의 표준으로 사용되는 영국법이 싱가포르에서도 통용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영국 법원 시스템이 싱가포르에 도입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인들이 싱가포르에서 상거래를 하는 것이 편리하도록 소프트 인프라를 깔았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싱가포르가 19세기에 영국 식민지였지만, 이 당시 Raffles 경을 비롯한 영국인들은 싱가포르의 다민족, 다언어 정체성을 존중하고 살려주었다. 그 덕에 싱가포르는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이민자들은 물론, 아랍 상인과 유럽 상인들도 자유로이 드나드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었기에, Raffles 경이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싱가포르가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한 덕에, 싱가포르는 국제중재를 처리하기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민족의 관습이나 법규만 일방적으로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호 수용할 수 있는 법제와 상인 간 계약을 모두가 존중하게 되었다. 그런 배경하에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게 중립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싱가포르 DNA의 일부가 된 것이다.

20세기, 리콴유가 만든 '국제분쟁 중심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싱가포르가 국제중재의 중심지로 도약하게 된 것은 리콴유(Lee Kuan Yew) 총리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물론 리콴유가 국제중재 육성을 정면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싱가포르를 믿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고,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특히 회사들이 국제거래를 진행하다가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법원이 중립적이고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한층 업그레이드한 공이 크다. 법과 계약은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원에서 강력하게 집행을 돕도록 사법부와 행정부에 최고의 엘리트들을 배치했다.

그는 싱가포르 공무원들 급여를 높게 책정함으로써 부패 가능성을 최소화했고, 청렴과 투명성을 항상 강조했다. 그 덕에 싱가포르와 아무 관련이 없는 국적의 회사들도 싱가포르에 와서 소송이나 중재를 믿고 할 수 있게끔 싱가포르의 브랜딩을 한 것이다.

리콴유는 영어를 싱가포르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면서, 전 세계 그 어느 기업이라도 편하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불필요한 기업 규제를 줄이고, 다양한 세제 혜택을 마련하여, 자연스럽게 싱가포르에 외국 자본 유치를 유도하였다.

한편, 싱가포르 국부펀드 및 금융기관들이 싱가포르에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하였다. 금융이 활성화되니, 법률 서비스가 활발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리하여 자문 변호사뿐만 아니라, 소송 및 분쟁 해결 분야에서도 싱가포르 변호사들이 대거 육성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싱가포르 로펌뿐 아니라, 영국 로펌이나 미국 로펌도 싱가포르에 대거 진출하여 국제분쟁 변호사가 활약할 수 있는 법률 인프라가 탄탄하게 구축되었다.

21세기, 수입 산업이 된 국제중재

리콴유가 친기업적인 싱가포르의 틀을 만들고, 사법부와 행정부의 선진화를 이끈 가운데, 싱가포르에서 국제중재가 산업으로 인식된 것은 21세기 초부터다. 싱가포르는 천연자원이 없고, 인구도 많지 않아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이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나라이다 보니 일찌감치 싱가포르 정부는 국제분쟁을 수익이 되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고, 이를 약 25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전 세계 최고의 국제중재 변호사들을 초대해 그들을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여기에는 한국변호사도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싱가포르 스타일 국제중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분쟁해결 절차가 되도록 싱가포르 법무부는 공을 많이 들였다. 더불어, 국제중재 심리 시설도 최신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그게 바로 싱가포르에 있는 맥스웰 챔버스(Maxwell Chambers)이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싱가포르 정부는 요즘 '국제중재'만 홍보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국제분쟁' 유형을 가리지 않고 싱가포르 국제법원에서 '국제소송'이나 싱가포르 국제조정센터에서 '국제조정'까지 세트로 홍보하고 있다. 요즘 기업들의 다양한 니즈를 고려하여, 꼭 싱가포르에서 국제중재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형 불문하고 어느 국제분쟁이라도 싱가포르에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는 매년 8월 말에 정부 주도로 싱가포르 컨벤션 주간(Convention Week)을 진행하는데, 여기서 컨벤션은 싱가포르 국제조정 협약(Singapore Mediation Convention)을 지칭한다. 이 주간에는 싱가포르 법무부가 전 세계 국제분쟁 전문가들을 초대하여 심포지엄을 개최하는데, 주제는 국제조정에 한정되지 않고 국제중재, 국제소송도 포함한다. 이 행사 참석자가 천 명이 넘는다. 세계적인 국제분쟁 축제를 싱가포르 정부 주도로 매년 주최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 행사 기간에 싱가포르 법무부가 매년 아시아 차세대 국제중재 변호사 30~40명을 초대해서, 국제중재 제도 개선에 대해 난상 토론도 하고 친목 도모를 하는 이벤트가 있다. 여기에 싱가포르 법무부 장관도 매년 함께 참석한다. 각국 청년 변호사들은 2~3시간 동안 싱가포르가 어떻게 국제중재 중심지로 성장했는지 노하우를 듣고, 각국의 트렌드도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싱가포르의 친선 홍보대사가 될 수밖에 없다.

아시아의 향후 차세대 국제중재 리더들이 싱가포르의 매력에 스며드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싱가포르 정부가 얼마나 치밀하게 국제중재를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싱가포르의 '골목시장 이론'

싱가포르에 오면 여러 나라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노점상들이 수십 개 많게는 이백여개 모여 있는 작은 시장이 있는데, 이를 호커(hawker) 센터라고 한다. 여기서 파는 음식은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다. 중국 음식, 말레이 음식, 인도 음식, 심지어 한국 음식도 호커 센터에서 판다. 싱가포르 내에 이런 호커 센터가 백여개가 넘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인다.

다양한 음식점들이 한 군데 모여있으니, 현지인들도, 외부 방문객들도 호커 센터로 발걸음이 향한다. 개개의 호커 음식점들은 임대료 지원 등 정부 보조를 받는다. 음식 장사를 하려면 골목시장을 형성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싱가포르 정부도 이해하고, 그에 맞춰 이런 지원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골목시장 육성 마인드가 국제중재 산업 진흥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국제분쟁 해결을 위한 인프라를 촘촘하게 잘 짜놓음으로써, 싱가포르 기업이든, 다른 나라 기업이든, 싱가포르에 와서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호커센터를 사랑하는 싱가포르인들의 비즈니스 감각과 유연함이 싱가포르 국제중재 산업 육성에도 스며들었다고 보면 된다.

한국 기업의 국제분쟁 승소 전략

최근 한국 기업들의 국제거래도 활발하다. 그래서인지 싱가포르에서 국제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나라와 법체계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싱가포르에서 한국 기업이 분쟁에 휘말리게 되면 승소를 할 수 있는 핵심 전략은 무엇이 있을까?

한국은 영어가 공용어가 아니고, 법체계도 영미법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스토리텔링 능력이 탁월하다. K-드라마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도 한국인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낼 때 보편적으로 공감대를 끌어내는 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그런 점에서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적으로, 필자가 알기로 싱가포르에는 대형 서점이 단 한 군데밖에 없다. 그만큼 책을 구입하고 이야기를 향유하는 문화가 아직은 덜 확산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문학, 영화, 음악도 그렇다 할 것이 별로 없다.

그러니 싱가포르에서 국제중재를 겪고 있는 한국 기업자들에게 중재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스토리를 잘 구성해보라고, 그 방면에 우리는 강점이 있다고 격려를 해주고 싶다. 한국인이 이미 그 누구보다 잘 하는 분야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도 같이 덧붙이면서 말이다.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