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긴장의 시대, 다시 인간을 향한 믿음으로
80대 ‘거장’의 블록버스터…스필버그 영화에 원하는 모든 것 담겨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디스클로저 데이》는 단어를 먼저 곱씹게 되는 영화다. '폭로(Disclosure)'.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제목은 무언가 놀랍게 드러날 사실이 있고, 그것이 세상에 밝혀지는 특정한 날을 예고하고 있다. 알려진 대로 영화는 외계 생명체와 밀접하다. 이는 10대 시절 만든 《파이어라이트》(1964)를 시작으로 스필버그가 평생 영화로써 탐구하고 천착해온 필생의 테마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신작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기보다 《미지와의 조우》(1982)로부터 본격적으로 열린 신화의 영역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이를 믿는다면 아직 낱낱이 입증되지 않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공상과학의 범주에 머무를 것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은폐와 공포를 바탕으로 한 통제가 필수적이라는 믿음에 반기를 드는 평등한 진실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한층 더 격렬하게 분열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와 같은 삶의 지침과 의미로 받아들이며 소통을 시작할 것인가.

음모론과 사실 사이
미국의 상상력 범주는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확연히 달라졌다. 정부와 기업의 결탁 혹은 그들이 은폐하고 있는 미지의 것들로까지 향하게 된 것이다. 그중 하나가 정부가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는 음모론이다. 1947년 로스웰 사건(미국 뉴멕시코주의 로스웰에 미확인비행물체가 추락했고, 미 정부가 외계 생명체의 사체를 수습한 것을 은폐했다는 주장)부터 이어진 유구한 음모론의 역사는 2023년 미 의회에서 UAP(미확인 이상 현상) 관련 청문회를 연 사실, 지난 5월 트럼프 행정부가 공식 사이트를 개설하고 UAP 관련 목격 보고와 시각 자료를 공개한 것까지 가설과 사실의 중간 지점에서 서사를 쌓아왔다.
스필버그는 평생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모범적 기준이 되어온 동시에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를 완성한 연출가다. 《디스클로저 데이》가 공개되기 전 외계 생명체를 중심에 둔 스필버그의 집대성 같은 작업일 것이라 예측됐던 것도 단순한 호들갑만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베일이 벗겨진 신작은 감독의 전작 중에서도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풍의 활극보다는 《듀얼》(1971), 《슈가랜드 특급》(1974),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우주 전쟁》(2005) 등 음모론과 서스펜스를 결합한 작품들의 분위기에 가깝다. 은폐된 사실을 고발하려는 자의 신념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장르가 전혀 다르지만 《더 포스트》(2018)의 맥락이 읽히기도 한다.
시작에는 폭로를 준비하는 내부 고발자 다니엘(조쉬 오코너)이 있다. 그는 로스웰 사건 이후 지구상에서 일어난 모든 UAP 영상 기록과 정보를 수집하고 은폐한 기업 '워덱스'의 에드워드 스노든 같은 존재다. 그가 손에 쥔 70년 넘는 시간의 기록 안에는 외계 생명체들에게 강제한 생체실험이나 UAP에서 발견된 기술을 역설계해 인류가 활용해온 사실도 잠들어 있다.
한편 캔자스시티의 한 방송국에서 기상캐스터로 일하는 마가렛(에밀리 블런트)은 창문으로 불현듯 날아든 홍관조를 목격한 이후 초월적 능력을 발휘한다. 학습하지 않은 타국의 언어를 술술 말하거나 처음 본 타인에게서 그의 사연을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식이다. 따로 진행되던 두 사람의 여정은 마가렛이 생방송 도중 정체불명의 언어를 발음한 이후 하나의 줄기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폭로를 막으려는 워덱스의 국장 스캔런(콜린 퍼스) 일당은 다니엘과 그의 연인 제인(이브 휴슨)뿐 아니라 마가렛에게까지 추격의 레이더를 넓히고 포위망을 좁혀온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마가렛이 점차 인류에게 전언하는 일종의 메시아나 구원자처럼 묘사되는 사이에 다니엘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그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마가렛을 필요한 자리까지 인도하는 사도들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그 가운데 파계 수녀인 제인은 이야기에 종교적 함의를 부여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다니엘과 달리 제인은 지구상에서 일어날 거대한 혼란을 염려한다. 절대자를 믿도록 교육된 인류에게 실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를 보여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혼란스러워하던 제인이 신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믿음'을 회복의 과제로 받아들일 때 이 영화의 주제는 더욱 선명해진다.
극 중 외계 생명체들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태도는 극 중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악의 핵전쟁에 직면한 지구상의 폭력적 분쟁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빚어내는 긴장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다. 애초에 그들이 마가렛에게 나누어준 능력 중 하나는 처음 본 타인에게서 그의 사정을 읽어내는 법이다. 상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마가렛을 만난 이들은 꼭 필요했던 신의 음성을 들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인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에 공포에 휩싸였던 마가렛의 말뜻은 "모르는 걸 두려워 마라"다. 《디스클로저 데이》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미지의 존재이든, 생명부지의 타인이든, 나아가 과거를 억압했던 자기 자신마저도.
불확실성만을 확실한 정체성으로 남겨둔 듯한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그 어떤 작품보다 더 인간을 향하고 있다. 외계의 존재를 다루지만, 이것은 외려 인류에게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관용과 성숙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그의 모든 이야기가 지구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스필버그 작품의 영혼은 미지의 것을 향하지만, 시선은 언제나 인간을 향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은폐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하자는 제안. 우리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점에 당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낙관. 《디스클로저 데이》는 SF의 옷을 입은 가장 정치적인 영화다.
때로는 답이 아닌 질문 제시의 의도를 넘어 회피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마가렛과 다니엘이 조우하면서 그들이 비슷한 우주적 경험을 공유하며 연결된 존재였다는 과거가 드러나지만, 두 사람의 사연은 더 나아가지 않고 모호함에 머무른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낙관적이고 감정적인 엔딩 또한 최선의 결말에 도달한 것인지 의문을 남긴다.
다만 군데군데 느슨한 각본을 상쇄하는 블록버스터로서의 매력은 위력적이다. 다니엘의 주변으로 미스터리 서클이 그려지는 장면, 기차와 자동차를 동시에 활용한 추격신, 스필버그 특유의 유머 감각이 발휘되는 시퀀스들은 가장 클래식하기에 순수한 경탄을 부른다. 웅장한 스코어, 경외감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에 다가가는 역동적 카메라, 필요한 곳에 탁월하게 발휘하는 렌즈 플레어까지 스필버그 영화에 원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80대에 접어든 거장 감독에게 여전히 이토록 순수한 경탄과 탐구의 영역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작지 않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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