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 거부, 서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

홍성희 2026. 6. 13.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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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엄마를 암으로 떠나보낸 임현민 씨. 엄마는 투병 중 한 대학병원에 방문한 날, 현민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썼다."

놀랍진 않았습니다.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항상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셨고, 자력으로 살기를 원하셨어요."


가족들은 엄마 뜻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엄마는 서울의 한 호스피스 전문 기관에 입원했고, 이후 통증 완화 치료만 받으며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엄마는 의식이 거의 없는 와중에도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몸을 움직이긴 힘들지만 들을 수는 있다는 것이 당시 의료진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지난해 6월 엄마는 가족들의 위로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민 씨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 욕심에 항암 치료를 하자 혹은 하지 말자고 결정하면 그 몫은 제가 다 떠안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머니한테는 강요가 될 수 있잖아요. 마지막 결정권은 어머니한테 드렸고, 그 안에서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지나갔을 때는 후회가 덜한 것 같아요."


연명의료를 받을지 여부를 사전에 정해둘 수 있는 '사전연명의료결정제도'가 도입된 게 2018년입니다. 초고령 사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자는 취지입니다.

연명의료는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 기간만 늘리는 인공호흡기 착용, 심폐소생술 등의 시술을 말합니다.

환자의 고통이 큰 데다, 한 달 수백만 원에 이르는 의료비 부담에 65세 이상 노인의 84%는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2023 노인실태조사)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의향서에 서명한 사람은 3백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2023년 기준 노인 사망자 중 연명치료 없이 사망한 비율은 16.7%에 불과합니다.('연명의료, 누구의 선택인가. 환자 선호와 의료현실의 괴리, 그리고 보완 방안', 한국은행)

여전히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연명치료가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인데, 이유가 뭔지 취재했습니다.

■ 서명만으로 마지막 선택이 존중되진 못한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연명의료 거부는 법적으론 본인의 서명만으로 가능합니다.

평소 보건소 등에서 상담 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하면 정부 시스템에 등록되고, 필요할 때 의료진이 조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서명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보호자의 의사' 역시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무리 서명이 있더라도, 보호자가 치료를 요구하면 중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보호자와 상의하는 하은진 서울대병원 교수(화면제공: 서울대병원)

현장 의료진이 전한 실제 사례를 소개합니다.

지난해 봄, 70대 여성 환자가 뇌출혈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이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어머니가 문서를 써둔 건 알지만 이렇게 갑자기 쓰러진 상황까지 생각하고 쓰신 것은 아닐 것 같다" "며칠 전 식사도 했는데 지금 치료를 멈추는 건 포기하는 것 같다"며, 치료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이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생명 징후는 안정됐지만,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보호자들이 환자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하는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우선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실 자체를 몰랐거나, 알았어도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치료 중단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고, "일단 살려달라"고 반응하기 쉽습니다.

하은진 서울대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
"가족들이 준비돼 있지 않고,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에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몰라서 일단 환자를 살려달라는 쪽으로 해서 치료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임종기를 벗어나면 중증 신경학적 장애 상태이더라도 기관 절개나 침습적인 치료를 중단할 수 없고, 지속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현장 의료진이나 상담사들은 '서명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가족과 함께 가치관을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의 한 상담가는 "상담 시 강조하는 게 가족과 공유하라는 것"이라며 "'내가 고통스럽다' '일그러진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남겨지는 것을 나는 절대로 원하지 않으니, 나의 결정은 꼭 지켜주기를 바란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환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삶의 모습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장애 수준, 기계 의존 생존에 대한 가치관 등이 공유될 때, 가족들도 환자 의사를 존중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일학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를 환자에게 물어보는 것을 무안하게 느끼고, 환자 역시 그 뜻을 밝히면 가족들이 부담스러워한다"며 "어찌 보면 우물쭈물하다가 어려운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정작 환자는 없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환자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도 중단을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생사를 가르는 문서라고 볼 수 있지만, 현행 서식은 단 2장 분량입니다. 사실상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한다는 서명이 전부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등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22장 분량의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식을 보면 '중단 동의'에 앞서 본인의 가치관과 신념부터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오래 사는 것'과 '편안히 사는 것' 사이에서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는지 점수를 매기도록 하는 식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의료 방식도 구체적으로 선택합니다. 주관적인 서술도 가능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전의료지시서

이일학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환자가 치료에 대한 선호를 상세히 밝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는 의료진이 환자 의사를 굉장히 존중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겠다는 뜻"이라고 밝혔습니다.

서식이 구체적일수록 의료진이나 가족들이 환자의 의사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치료 범위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대면 상담 후 작성해야 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온라인'으로 등록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접근성은 높일 수 있겠지만, 서명자를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앞서 보듯,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실제 작동하려면 가족 또는 의료진과 충분히 상의하는 '절차'가 마련돼야 하고, 서식 또한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 사망 임박해서야 연명의료 중단 가능

현행법상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시기가 '임종기'로 제한된 것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 과정'과 '말기'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연명의료결정법 2조(정의)
1. "임종과정"이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3. “말기환자(末期患者)”란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말한다


그런데 말기와 임종 과정의 구분이 의학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 의료 현장의 이야기입니다.

기대 여명으로 구분할 뿐인데, 환자가 얼마나 더 생존할지 예측이 쉽지 않은 겁니다.

보건복지부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의학 전문 학회 대표 27명 중 82%가 임종기를 말기로 앞당기는 방안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의료 환경변화 대응방안 연구)

관련해 복지부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적 공론화를 시작한다는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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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희 기자 (bombom@kb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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